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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뭐하세요? | 박민규

등록 2005-06-10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민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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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은 다음과 같다. 우선 왼발(어느 발이라도 상관은 없다)에 체중을 싣는다, 그리고 뒷꿈치를 든다. 이때 체중은 엄지발가락과 그 아래 뼈(그러니까 의학용어로 족지골 - Phalanges이란다. 미, 미안하다)에 집중이 된다. 그 상태에서 오른발을 뒤로 민다. 핵심은 발을 민다기보다는 무릎의 뒤쪽, 즉 오금을 민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상상력이 받쳐준다면, 오금에 낚싯줄을 건 누군가가 순간 줄을 당긴다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충분히 발을 밀었으면 이제 체중을 오른발로 옮길 차례이다. 순식간에, 그리고 위의 절차를 반복하면 스텝은 완성된다. 그것이 문워크(moonwalk)다.

왜 당신은 무빙워크만 하는가

나는 문워크의 달인이었다, 라고 쓴다면 아마 당신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여전하군, 반가워). 그럼 고쳐서 우리는 문워크의 달인이었다, 라고 쓴다면 우리는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랬다. 그 시절엔 누구나 문워크를 할 수 있었다. 교실에서 복도에서, 독서실의 옥상과 골목길에서, 거리에서, 우리는 누구나 문워크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집이 시골인 친구 중엔 논두렁에서 문워크를 연습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러니까 말하자면 - 빌리진 이즈 낫 마이 러버.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과감히 이런 대답을 할 것이다. 문워크를 하던 소년들이, 모두 무빙워크만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철컥, 일렬 종대의 길고 긴 고리에서 내 몫의 카트를 분리하며 나는 생각한다. 늦은 밤, 할인점은 넓고 살 것은 많다. 장자의 낮잠 한토막처럼 - 내가 이 카트를 밀고 가는 것인가, 이 카트가 나를 끌고 가는 것인가. 체중을 옮길 필요가 전~혀 없는 무빙워크 위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멀고 먼 달은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언제, 달 위를 걸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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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이 된 내 친구는 요즘 자꾸 배가 나와 걱정이다. 헬스를 끊은 녀석은 매일 러닝머신에 올라가 땀을 흘린다고 자랑인데(그건 분명 자랑이라고 봐), 같이 헬스를 하는 건 아니지만 종종 함께 쇼핑을 하는 편이라(부부 동반으로! 여보 나 이거 진짜 피곤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대체 어떤 삶일까? 덜 덜 덜 앞장선 친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러닝머신과 무빙워크 사이에 우리의 삶이 있다. 우리는 왜 - 걸어야 할 곳에서 걷지 않거나, 걸어야 할 곳에서 뛰어야만 할까(자발적으로,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문워크와 소년들의 이데아

돌이켜보건대 이데아란, 즉 말하자면 혁명은 문워크와 같은 것이었다. 욕심이란 중력은 여전히 작용하지만,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걷고, 미끄러지고, 꿈꾸는 것이었다. 그게 뭐예요? 아내가 물었다. 문워크… 기억 안 나? 그날 밤 간만에(이십년 만이다, 이 사람아) 나는 거울을 보며 문워크를 해보았다. 문워크는 잘,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은 편이었다. 뭐예요 그게? 라고 되묻는 아내에게 나는 바닥이 안 좋아, 라고 답해주었다. 쌔근쌔근 아들은 자고 있었다. 러닝머신에서 뛰거나 역시나 무빙워크를 타게 될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는 달의 표면을 걷고자 했던 소년들의 이데아와 노력을 떠올렸다.

친구여, 오늘은 잠시 사무를 접고 한번쯤 일어나 문워크를 해보는 건 어떨까. 부장님 뭐하세요? 응, 이건 문워크야. 그것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스텝이다. 바닥이 안 좋아, 이 바닥을 떠야겠어 라는 말보다는, 그래도 이 땅에서 내딛는 한 발짝의 문워크가 절실할 때다. 다시 한번 음악을 떠올리며, 말 그대로 글쎄 ‘빌리진’은 우리의 연인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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