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전철 연장 개통으로 청년기 맞이한 천안시의 모습… 역세권 개발·교육도시 부상이 반가워
▣ 천안=글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여기서도 서울 교통카드 쓸 수 있나요?”
전철 매표소 앞에서 어설픈 질문을 던지는데 누군가 뒤에서 한마디 던졌다. “아니, 아직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3월2일 아침 7시 천안역. 플랫폼으로 뛰어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했다. 서울역으로 가는 7시6분발 급행열차는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짜신문’을 서둘러 읽는 사람들, 타자마자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든 사람들. 빈 자리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신문을 휙휙 넘기며 주요 뉴스를 훑고 난 뒤 두꺼운 전공서적을 꺼내든 차재형(26)씨는 “직장을 옮기면서 마침 전철이 개통돼 운이 좋다”고 말한다. 본래 오창과학단지에서 일했던 차씨는 2월부터 수원으로 출퇴근하게 됐다. 독립기념관 근처 목천읍에 사는 그는 승용차로 천안역까지 온 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매일 7시6분 급행열차를 탄다. 천안역에서 수원 회사까지 가는 시간은 1시간20분. 덕분에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지만 훨씬 만족스럽다. “예전 직장까지 가는 데는 고속도로 통과료가 왕복 8200원이었고, 기름값이 한달에 50만원 이상 들었지만 이젠 왕복 전철비 4600원밖에 들지 않으니까요.” 그는 천안역에서 출발하면 앉아서 갈 수 있어 공부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평택역을 지나자 오산역부터는 서서 가는 사람들이 늘더니 성균관대역과 수원역에 이르러 붐비기 시작했다. 인천선과 수원선이 만나는 구로역과 5호선과 1호선이 교차하는 신길역에선 객실이 빼곡해 들어설여지조차 없었다. 특히 이날 아침엔 함박눈이 펄펄 내렸던 탓에 더욱 객실이 붐볐다. 8시30분. 서울역 도착. 80여분 동안 달려온 전철은 여기서 몸을 풀었다.
7시6분발 열차, 8시반 서울역 도착!
1월20일 천안역 전철 개통은 우리나라 교통 역사에 새로운 획을 더하는 순간이었다. 수도권 전철이 처음으로 충청권에 닿은 것이었다. 전철은 서울과 인천광역시, 경기도에 충청도를 더함으로써 경기와 충청을 묶어 부르던 ‘기호지방’이 새로운 개념으로 구축됐다. 머릿속 교통지도가 다시 그려지게 된 것이다. ‘서울시 천안구로 오십시오.’ 지난해 한국고속철도(KTX) 천안아산역(온양온천역) 개통 즈음 등장한 천안의 신축 아파트 분양광고는 이런 들뜬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서울시 천안구라고요?” 천안시청 오석교 정책팀장은 허허 웃었다. “솔직히 전철 개통하면서 반가움과 함께 걱정도 많았습니다. 천안 지역 상권이 모두 수도권에 빨려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제일이었고, 이러다 천안이 서울의 베드타운이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우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전철이 다니고 나니 걱정이 덜 되는군요. 성급한 판단이긴 하지만 민간투자가 서서히 살아나는 분위기이거든요.”
오 팀장은 두정역과 천안역 주변에 복합상영관과 대형 상점들이 지어지고 있고, 호두과자 판매소만 해도 6~7곳이 더 늘었으며 재래시장이나 5일장에도 손님들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서울·경기는 2천만이고 천안은 50만이니 아무래도 내려오는 사람이 올라가는 사람보다 많지 않겠어요?”
대학들도 웃음꽃이 피었다. 천안은 단국·상명·호서·천안·순천향·선문·남서울대·나사렛대·한국기술교육대 등 9개 대학이 밀집해 있어 고등학교보다 대학교가 많은 도시다. “개나리꽃이 늦게 피는 순서대로 대학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웃지 못할 소리가 있을 정도로 서울과 가까운 대학을 선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천안·아산은 수도권 지역에서 등하교가 가능한 ‘마지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천안 대학들은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등록률이 97~98%를 웃돌고 있다. 선문대 노상근 학생선발팀장은 “이 지역 대학들은 서울·경기·인천 출신 학생들이 70~80%에 이르기 때문에 전철 개통이 학교 운영·홍보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이학수 천안역장은 “전철 개통 전엔 경부선·장항선 승객이 2만명 정도였는데, 2월엔 평균 3만6천~8천명 수준이다가 대학들이 개강한 첫날엔 4만1천명 정도가 천안역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강릉에서 건너와 눌러산 지 13년”
예로부터 ‘천안삼거리’라 하여 이름난 교통의 요지이긴 하지만, 그동안 ‘삼거리’는 ‘호두과자’만큼 그 의미가 선명하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도보·말 같은 교통수단에 의존하던 조선시대에 천안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는 지금의 대전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 시대엔 한양에서 동작대교를 건너 과천으로 내려오다 보면 천안에 이르러 두 갈래로 길이 갈라졌다. 한쪽은 병천을 거쳐 청주로 들어가 추풍령을 넘어 상주·김천·대구·경주·동래로 이르는 길이고, 또 한쪽은 공주 감영을 거쳐 논산·전주·광주·순천·여수·목포로 통하는 호남길(삼남대로)이었다. 영호남의 분기점이었던 천안삼거리엔 자연스레 주막촌이 세워져 나그네를 쉬게 했고, 이런 연유로 ‘흥타령 전설’의 배경이 됐다. 충청도에 사는 한 홀아비가 삼거리 주막에 맡긴 딸 능소가 이 길을 지나던 선비와 사랑을 나눴다가 후일 선비가 장원급제하고 돌아와 백년가약을 맺는 해피엔딩 스토리인데, 능소는 서방님을 만나자 너무 기뻐 <흥타령>을 절로 불렀다고 한다.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흥….’ 풀어졌다 합쳐지는 길처럼 흥타령 전설은 사람의 인연과 세상의 조화를 구수하게 풀어낸다. 향토사학자 황서규(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씨는 “천안삼거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872년 ‘천안군지도’에는 삼남대로(호남대로)로 가는 길과 영남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모습이 분명하게 표시돼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천안삼거리의 명성은 현대에는 고속도로(경부선), 국도(1번국도), 일반철도(경부선과 장항선의 분기점), 고속철로, 수도권 전철이 시원스럽게 뚫린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사람이 자꾸 다니면 길이 넓어지는 것처럼 길은 사람을 모은다. 강릉이 고향인 정원석(41)씨는 13년째 천안에 살고 있다. 일터(삼성반도체)가 천안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천안에 살게 되었는데, 초반엔 계속 천안에 살 것인지를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시가 성장하면서 교육·문화 시설도 꾸준히 늘자 살 만하겠다 싶어졌고 그러다 보니 눌러살게 됐다. “천안에서 태어난 두 아이들(6·4학년)은 자신을 ‘천안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최근 택지개발이 된 신흥 아파트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외지에 와서 느끼는 불편은 별로 없어요.”
1995년만 해도 인구가 33만4800여명이었던 천안시는 지난해 50만명을 돌파해 인구 규모로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12위를 차지했다(광역·직할·특별시 제외). 이런 속도로라면 2020년께는 95만명을 육박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시 예산 규모도 올해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다. 도시는 구도심권 외곽 북·서·남 순서로 팽창하고 있는데 두정역 근처의 북부지구와 KTX역과 가까운 불당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지난해 완료됐고, 2008년께는 청수지구 개발이 마무리될 계획이다. 오석교 천안시 정책팀장은 “천안시가 커온 흐름을 살펴보면 처음엔 천안역 주위가 번성했다가 그 다음엔 고속버스터미널 주변으로 번화가가 옮겨지고, 그 다음엔 북부지구·불당지구 등 택지개발사업지구가 떴다”고 설명한다. 오 팀장은 “이제는 전철이 개통하며 역세권 주변의 개발이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20년 뒤 천안+아산 광역시가 나올까
천안 주민들에겐 ‘서울시 천안구’보다 ‘천안+아산’이 내심 기대되는 눈치다. 우량아처럼 쑥쑥 자라온 천안은 그동안 이웃한 아산과 여러 차례 갈등의 불씨가 있었다. 예를 들어 KTX 정차역 이름을 두고도 천안과 아산 주민들인 서로 얼굴을 붉혀야 했다. 아산과 천안의 경계에 놓인 KTX역은 행정구역상으로만 보자면 아산시에 속하는 부분이 더 많았는데, 처음엔 천안역으로만 하려다가 아산 주민들의 반발에 부닥쳐 ‘천안아산역’으로 정해지게 된 것이다. ‘천안아산’으로 불리는 것은 천안 주민들로선 반가운 일이다. 2004년 정부가 발표한 ‘아산만권 배후 신도시개발사업은 866만평 규모의 신도시를 건설하는 계획인데, 천안의 부동산 업소들은 ‘천안아산신도시 토지이용 구상도’ 같은 것을 붙여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두정역 근처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이은주씨는 “천안과 아산의 경계지가 대규모 신도시로 개발된다면 아무래도 천안·아산이 합쳐져 20년쯤 지나면 광역시가 되지 않겠느냐”며 희망을 내비쳤다. 도시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면, 천안은 청년기를 맞아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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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이 개통되면서 천안역 주위엔 더욱 ‘어르신 여행객’들이 늘었다. 별로 바쁠 일 없는 65살 이상 노인들은 서울에서 출발해 두어 시간 가까이 공짜 전철을 타고 천안으로 온다. 3월2일 오전 10시 서울역에서 출발한 ‘강릉 김씨 할아버지(80)’도 그랬다. 일산·이천·안산 등에 사는 고향 친구들과 일제히 서울역에 집결해 112분 동안 담소를 나누며 천안으로 내려왔다. “어디로 가실 거냐”는 질문에 “자장면을 사면 얘기해주겠다”던 할아버지들은 천안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온양온천으로 떠났다. 2800원 목욕비와 자장면값 3천원이면 소박한 하루의 나들이가 즐겁다. 천안역에선 온양온천 외에도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열사·조병옥·이동녕 생가도 있어 볼거리가 많다. 1일과 6일에 열리는 아우내 5일장터를 구경하고 각종 야채가 풍성하게 박힌 뜨끈한 ‘병천순대’를 맛보는 것도 별미다. 이학수 천안역장은 “천안행 전철은 ‘경로철’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사회복지 차원에서 바람직한 일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여행객을 편안히 맞이하기엔 천안은 미처 채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천안역 광장 앞 여행안내소는 “직원이 그만뒀다”는 이유로 며칠째 닫혀 있어 순대를 어디서 파는지, 온천은 어떻게 가는지 궁금한 할아버지·할머니들을 응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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