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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찾기는 계속된다

등록 2004-09-17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파주 헤이리에서 만난 예술인회관 점거 프로젝트 ‘오아시스팀’… “정부 · 예총 상대로 끝까지 매달릴 것” </font>

▣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박항구 기자 underfl@hani.co.kr

모든 작가들의 소박한 꿈 한 가지는 맘놓고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이다. 허름해도 바람과 햇볕을 막는 지붕이 있고 빗물에 작품이 훼손되지 않는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할 작가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인마을의 입주 작가들처럼 커다란 작업실과 멋진 전시장을 지니고 있다면 정말 이들은 축복받은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예술인들을 위한 작업공간을 만들자며 시작했으나 5년째 공사가 중단된 서울 목동 예술인회관에 작업실 분양광고를 내고 점거 퍼포먼스를 벌였던 오아시스 프로젝트팀( 516호). 이들이 작가들의 근사한 작업장이 무더기로 몰려 있는 파주 헤이리 예술인마을 가을 페스티벌(9월26일까지)에 참가했다.

웨딩드레스와 흰 똥의 퍼포먼스

9월11일 오후 1시 예술인마을 내 종합촬영소. 개막식이 예정된 이곳엔 와인과 간단한 뷔페상이 마련됐다. 와인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던 참석자들이 잠시 술렁였다. 얼굴을 흰색 면사포로 칭칭 동여맨 두 사람이 카트카를 나란히 타고 촬영소로 ‘침입’한 것이다. 여자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었고 남자는 곰인형의 ‘가죽’을 도려내 이어붙인 것 같은 희한한 털드레스를 입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기획·주도해온 부부 작가 김현숙·김윤환씨였다.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김윤환씨의 면사포가 바퀴에 칭칭 감겨 꼼짝할 수 없었다. “이사도라 덩컨 같구만.” 관객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보다못한 누군가 라이터로 면사포를 지져 구해냈다. 가까스로 카트카에서 빠져나온 김씨는 부인과 함께 천천히 실내를 돌기 시작했다. 관객들 사이를 한바퀴 빙 돈 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뽕~ 치익~. 똥눌 때 피익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김씨가 앉았던 자리엔 흰색 똥무더기가 쌓였다. 부인 김씨는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들꽃 한 송이를 똥 위에 놓았다. 남편 김씨는 몇 걸음 걸어간 뒤 또 똥을 누었다. 똥 한 무더기마다 꽃 한 송이씩. 이들의 동선을 따라 개막 파티장은 걸을 때마다 발치를 살펴야 하는 ‘위험한’ 홀로 천천히 바뀌어갔다. 영역 표시를 확실히 한 셈이었다. 똥 의식을 진지하게 마친 뒤 이들은 관객들에게 액체 스티로폼 튜브와 고무 병아리 인형을 보여주며 똥누는 비밀을 공개한 뒤 다시 차에 올라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지구’. 이들의 퍼포먼스 제목이었다. “우리는 작가들이 두더지와 같다고 생각했어요. 눈에 잘 안 띄는 땅 밑에서 살아가는 두더지들은 땅을 조금씩 갈아엎으며 미세하게 흔들리는 땅의 진동을 전하지요. 우리는 두더지처럼 세상을 가만가만 흔들며 조금씩 바꿔나가고 싶습니다.”

예총, 10년 잘못 외면한 채 작가들 고발

지구야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지난 몇달 동안 오아시스팀은 가열차게 투쟁해왔다. 입주를 원하는 작가들을 모아 몇 차례 세미나를 열고, 7월17일엔 ‘모델하우스’를 방문했으며, 비록 반나절 만에 쫓겨나긴 했으나 8월15일엔 ‘입주식’도 치렀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예총)는 오아시스팀이 제멋대로 분양광고를 내고 밤에 몰래 예술인회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은 데 격분하여 오아시스 주도자들을 고발했다. 처음엔 사기 분양과 건물 무단침입 두 가지 죄를 물으려 했으나, 돈을 받지 않고 분양을 했다는 점에서 사기 분양은 성립되지 않아 건물 침입만을 문제 삼았다. 오아시스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입주일로 정한 8월15일엔 무더기로 예술인회관에 들어가 점거 퍼포먼스를 벌였다. 성이 오를 대로 오른 예총은 당시 TV에 인터뷰가 나온 작가들을 색출하여 건조물 무단침입 혐의로 20명을 추가 고발했다.

검·경찰로부터 출두 요구서 등이 잇따라 날아오고 있다고 하면서도 김윤환씨는 괘념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10년 동안 잘못해온 예총과 정부가 사과·해명, 책임자 처벌 같은 조처를 취하지 않음을 목소리 높여 비판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예술인회관을 짓습니까? 임대 공간을 대폭 늘려 건축비를 마련하겠다는 예총 계획대로라면 지어진다고 해도 그게 임대빌딩이지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입니까?”

이들이 목놓아 외쳐도 정부나 예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문화관광부는 투명하고 공개적인 방법으로 다시 사업을 진행하도록 예총에 ‘한번 더’ 기회를 줬다. 10월30일까지 재시공을 하지 않으면 추가 교부금 50억원을 주지 않겠다는 단서를 달아놓았으나 예총이 호락호락 물러설 리 만무하다.

정책의 변화까지는 이끌어내지 못했으나 이들의 투쟁은 뜻밖의 민간 부문에서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한 방송의 시사프로에서 예술인회관을 둘러싼 잘못된 정책을 소개하며 작가들이 작업실을 구하지 못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낱낱이 보여주자 독지가들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버스회사 사장과 건설회사 사장 2명이 각각 서울 청량리(30평)와 고양시 행신동(120평) 두 곳을 작업실로 쓰라고 선뜻 내놓았다.

김윤환씨는 “호의에 대해선 너무나 감사해하고 있으나 예술인회관 문제는 끝까지 매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폐교를 활용하는 작가스튜디오 지원방식은 탁상행정식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술인회관은 그 첫 단추일 겁니다.”

오아시스팀이 단지 가난하고 젊은 작가들의 호응만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중견 작가들도 이들의 뜻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헤이리 페스티벌 개막식에 참가한 중견 작가 양주혜씨는 독지가들의 도움보다도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3년 전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양평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그동안 작품들을 끌고 옥탑방, 아파트 지하층 안 가본 것이 없었죠. 50이 넘어서야 드디어 쫓겨나지 않아도 되는 내 작업실을 갖게 됐을 때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그러나 지금 쓰고 있는 작업실은 ‘창고’로 등록돼 있어요. 법적으로 창고엔 난방도 못하게 돼 있지요. 몇몇 아주 유명한 사람들 빼고는 작업실을 못 구해 다들 쩔쩔매요. 예술이란 것이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돈 많아야 예술할 수 있나요?”

오아시스팀이 그동안 겪은 경험의 기록은 노순택씨의 카메라에 담겨 헤이리의 김정희연극관에서 전시 중이다. 김정희연극관은 예술인회관과 마찬가지로 공사가 덜 끝난 미완성 공간이다. 이곳에 김윤환·김현숙씨는 철근빔으로 틀을 짜 원두막 같은 임시 거처를 지어놓았다. 노순택씨의 작품과 함께, 사진가 한금선·안해룡씨도 작품을 내놓았다. 한금선씨는 집시들을 쫓아다니며 이들의 일상을 기록했고, 안해룡씨는 자기 땅인데도 출입증을 내보여야 들어갈 수 있는 민통선 부근 농민들의 표정을 담았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것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집시들의 자유로운 표정과, 제 땅도 남의 땅처럼 여기고 살아가도록 강요받는 농민들의 주름진 얼굴은 ‘공간의 소유’라는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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