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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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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 강요’는 기업의 마약이다

등록 2004-10-08 00:00 수정 2020-05-03 04:23

일반사무직에서 집배원·대학교수까지 영업 스트레스 받는 시대, 대학생 취재팀의 실태 추적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기업들이 비영업직 사원들에게 영업을 강요하는 행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강제할당에 따른 실적을 인사고과와 연결시키는 관행에 누구도 쉽게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경제가 어려우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식의 상황 논리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기업관행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쉬쉬해온 영업 강요의 실태를 대학생 독자 취재팀의 현장 추적으로 들여다보았다. 편집자


▣ 윤진형/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2년 vampire1@hanmail.net

▣ 윤준석/ 서강대 경제학과 2년 y003147@hanmail.net

▣ 이혜민/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4년 lhm5866@yahoo.co.kr

ㅇ사에 다니는 한아무개(30)씨는 올해 같은 계열사의 휴대전화 20개를 할당받았다. 그는 영업직은 아니었지만 상사의 ‘눈치’를 안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휴대전화를 팔았다. 일단 자신의 휴대전화를 바꾸고 그 다음으로 친한 친구, 가족들 것을 바꿨다. 그러다가 가입자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어서 동창회를 통해 친구들에게 가입을 권유했고, 한동안 연락도 않던 먼 친구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팔았고, 누나는 직장 동료들에게 휴대전화를 팔았다. 심지어 친구의 가족, 직장 동료에게까지 떠넘겼다.

휴대전화 20대의 끔찍한 기억

결국 할당된 20대를 다 팔긴 했지만 그에게는 끔찍한 기억이었다.

“아주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휴대전화 몇대 팔려고 제 자존심까지 팔아넘기는 기분이었습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다 보니 가족들이랑 말다툼을 하게 됐고, 친구들과도 멀어졌습니다.” 그는 “내년에도 휴대전화를 팔아야 할 텐데, 이젠 더 이상 팔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때론 실적을 올리기 위해 편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인사고과를 앞에 두고 실적을 올리지 못해 속을 태우던 ㅎ사 이아무개(28)씨는 영업 장부에 자신의 이름을 같이 올리는 조건으로 같은 회사 영업사원에게 15만원을 건넸다. 영업사원은 돈을 받은 대가로 마치 이씨와 함께 차를 판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15만원은 공공연히 실적을 살 때 정해진 액수란 게 이씨의 설명이다. 그는 “인맥이 없거나 성격이 활발하지 못한 사람은 돈을 주고서라도 실적을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영업사원이 아닌 직원들이 자신이 맡은 업무 외에 별도로 영업활동을 하는 것은 영업직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험설계사나 자동차 세일즈맨 같은 영업사원이 개인 소득의 증대를 위해 하는 자발적인 영업활동과 달리 비영업직의 그것은 회사 내부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밀려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비영업직들에게도 영업의 대가로 인센티브가 주어지지만, 인사고과의 불이익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이다.

ㅇ사 한아무개씨의 푸념에서 이런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사실 휴대전화 한대 팔 때마다, 7만~8만원 정도 돈을 받지만 그 돈 안 받고 말지, 아쉬운 소리 해가며 팔고 싶지 않습니다. 제 동료 중에는 할당량을 못 채워 자기 명의로 가개통을 하거나 경매 사이트에 싸게 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영업직 사원에 대한 영업 강요는 일반 사기업체에만 머물지 않고 우체국 같은 공기업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험과는 관련 없는 집배원들의 보험영업이다.

인천 ㅂ우체국 집배원 박아무개(47)씨가 가족 명의로 갖고 있는 보험통장은 모두 16개다. 심지어 박씨의 주위 사람들도 보험은 온통 우체국 보험이다. 박씨는 “처음엔 친구나 친척들한테 부탁했지만 이젠 부탁할 사람이 더 이상 없다”며 “이젠 누구한테 부탁해야 할지 전화 걸기가 두려울 지경”이라며 하소연했다.

우체국에는 1월부터 3월까지 ‘보험증강기간’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해 1년 영업 목표치를 한꺼번에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집배원들의 보험영업에 대한 부담은 이 시기에 최고조에 달한다. 하지만 부담감은 1년 내내 계속된다.

서울 ㄱ우체국 집배원인 홍아무개(43)씨는 “특히 승진심사가 코앞에 있을 때는 보험 실적을 올리기 위해 본래 업무가 잘 안 될 지경”이라며 “만일 할당된 보험을 완수하지 못하면 관리자에게 불려가 문책을 당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신문기사, 광고와 엿 바꿔먹다

1997년 국회사무처에서 발행한 전남과 경북 체신청에 대한 국정감사 결과 자료에서 이미 영업할당이 사원들의 업무 부담을 가중한다는 지적과 함께 그 해결책으로 ‘자율적 보험사업 목표 배정’이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현장에선 자율이란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강제’가 판치고 있는 상황이다.

15년 동안 집배 업무를 해온 집배원 이아무개(38)씨는 “보험뿐만 아니라 경조카드, 주문판매 같은 우체국 상품들도 개수를 정해 집배원들에게 할당하고 있다”며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몇푼 안 되는 월급도 털어야 한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민훈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비영업직들의 이같은 보험영업에 대해 “소비자들을 기만하는 행위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소비자들이 비영업직들이 제공하는 부정확한 정보에 의지해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며 “이는 소비자들에게 잠재적인 피해가 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비영업직들의 영업활동은 언론계에서도 예외 없이 성행하고 있다. 경제 전문지에서 근무하는 최아무개(29)씨는 “1년에 한달 정도 부수확장 운동을 한다”며 “올해는 회사에서 20부를 정해줬는데 계속되는 심리적 압박에 억지로 10부를 했다”라고 귀띔했다. 기자들의 부담은 신문 부수 확장에만 머물지 않고 ‘광고영업’에까지 뻗치고 있는데, 이는 부수확장과 견줄 수 없는 해악을 끼치게 된다. 기사의 중립성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중앙일간지에 근무하는 오아무개(43)씨는 한동안 국제부에 있다가 문화부 영화담당으로 부서를 옮겼다. 국제부의 특성상 광고영업에 관해 잘 몰랐던 그는 상사로부터 영화 광고를 유치해오라는 요구를 받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광고를 주는 회사에 도의적으로 좋은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며 “기사와 광고가 거래되는 현실 앞에서 기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라고 털어놓았다.

중앙 일간지보다 지방지의 상황은 더 심하다. 수도권 ㅇ일보 양아무개(36)씨는 “사실 이런 영업 행위로 언론의 정도가 위협받는 실정”이라고 한탄했다. 양씨는 예전에 한 중소도시에서 불법 콘크리트 공장을 취재한 적이 있다. 오염된 하수로 인해 주위 환경이 황폐화됨은 물론이고 관련 공무원까지 개입한 흔적이 있었다. 그는 잠복취재로 피곤했지만 기자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다음날 신문지면에 그의 기사는 없었다. 그는 선배로부터 ㄷ시청에서 신문을 대량으로 정기구독하고 광고도 계약하는 조건으로 결국 그의 기사가 ‘잘렸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기자가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공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한순간에 무너졌다”며 “기자와 영업사원이 다를 게 뭐냐”며 반문했다.

자동차 판매할당, 협력업체로도 전가

현재 영업강요 실태에 관한 객관적인 연구자료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취재팀은 자체적으로 어떤 업종에서 어떤 품목이 강제할당되고 있는지 실태 조사에 나섰다. 8월 한달 동안 민주노총 산하 전국 854개 노동단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실태 조사 결과는 우리나라 영업 강요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사 결과 자동차부품 제조회사의 직원 거의 대부분이 자동차 판매할당을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눈에 띄는 대목은 자동차 회사가 1차 협력업체로 할당한 차들을 다시 1차 협력업체가 2차 협력업체로 ‘재할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할당량은 회사 규모에 따라 1대에서 500대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실태 조사 결과 대학 교수들조차 신입생 유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영업을 뛰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방의 ㅇ대학 강사 김아무개(35)씨는 학기 첫 수업에 들어가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강생이 100명이 넘는다는 말을 듣고 수업에 들어갔는데 앉아 있는 학생은 고작 10명 안팎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강생 대부분이 ‘등록만 하면 수업엔 안 나와도 학점을 잘 준다’는 교수들의 선전만 믿고 아예 교실에는 나타나지도 않은 것이었다. 전북교수노조의 한 관계자는 “몇몇 교수들은 학생 유치를 위해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장학금을 대고 있는 실정”이라며 “교수들이 영업사원으로 전락한 것은 지방에선 이미 오래전 얘기”라고 말했다.

공정거래법(23조 1항 3호)에 따르면 ‘부당하게 자기 또는 계열회사의 임직원으로 하여금 자기 또는 계열회사의 상품이나 용역을 구입 또는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 공정거래위원회는 해당 기업에 최고 매출액의 2%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또 이러한 판매 강제가 근로계약에서 명시된 업무 조건에 반해 이뤄질 때는 근로자가 근로기준법 제24조와 제26조에 의해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장치는 어려운 경제 현실 앞에선 허울일 뿐이다.

배효정 노무사의 말을 들어보자. “근로자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은 극히 적을 것입니다. 약자인 근로자들이 인사고과의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선 회사의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영업 불참은 곧 퇴사를 의미하는 상황에서 생계가 걸린 근로자로서는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 이유태 사무관은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신고된 기업을 조사할 때 회사쪽에서 교묘하게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사원 판매의 강제성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의 ‘강제성’을 입증하지 못해 과거 소송에서 몇 차례 패소한 적이 있다.

지난 6월22일 KT 노사 양쪽은 비영업부서 상품판매 전면 금지에 합의했다. KT 노조 관계자는 “6월 협약 이후 비영업직에 대한 영업 강요가 사라진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앞으로 회사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며 “회사쪽이 또다시 합의 사항을 어긴다면 노조에선 강력 대응할 수밖에 없다”라고 밝혀 경계심을 드러냈다.

사실 KT에선 지금까지 이번과 비슷한 합의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2002년 10월5일자 상품판매와 관련된 부속합의서’ ‘2003년 4월21일자 상품판매 노사합의서’ ‘2003년 6월16일 비영업 부서의 전략적 상품판매 자율적 목표를 설정한 노사합의서’ 등이 그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합의가 계속해서 반복됐다는 사실은 영업 강요가 그만큼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KT ㅂ지점 전화국장을 역임하고 지난해에 퇴사한 정아무개(55)씨는 영업 강요 여부에 대해 “강요가 아니라 권유가 있었을 뿐”이라며 영업 강요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또 “회사의 매출이익을 높이기 위해 자사 제품을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건 사원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했다.

“순간 매출 늘어도 기업 효율성은 떨어져”

일반 사원들이 강제할당을 부담으로 여기는 반면 일부 간부들은 강제할당을 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여기는 극명한 시각차를 드러낸 셈이다. 이는 결국 비영업직에 대한 영업 강요가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것이란 분석으로 이어진다.

영업 강요를 당연하게 여기는 기업 풍토에 대해 서강대 경영학과 임채운 교수는 “우리나라에 만연한 단기 매출 중시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기업은 매출과 외형 중심의 성장전략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매출이 정체되면 경영자는 마치 사세가 위축된 듯한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원들을 독촉하고 압박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임수범 연구원은 “단기적 시각에서 사원에게 영업 업무를 떠넘기면 순간 매출은 늘겠지만 중장기적 시각에선 사원 개인뿐 아니라 기업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우리나라 기업의 ‘조급증’을 꼬집었다.

공정거래위 이병건 사무관은 비영업직에 대한 영업 강요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선 “공정위의 철저한 법 집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업 스스로 발상을 전환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주문했다.

과도한 영업 강요로 몸살을 앓는 기업과는 대조적으로 사원들의 자발적인 영업으로 신바람이 난 회사가 있다. 지난해 5월 매각 절차를 밟던 (주)세신이 자금 사정이 나빠지는 위기에 처하자 근로자들 스스로가 자사 제품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근로자들은 여름철 비수기인데도 불구하고 1억여원의 매출을 올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상품 판매에 참여했던 세신 노조 사무국장 양동수씨는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영업 강요에 대해 이렇게 꼬집었다. “물론 회사가 어려우면 사원들도 어느 정도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노사 양쪽의 신뢰와 합의가 우선이겠지요. 한쪽에서 무조건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사원들의 진정한 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봅니다.” 세신 근로자들은 올해 6월과 7월 사이에도 자발적인 상품판매 운동을 벌여 8천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비영업직 40% “영업강요 받았다”

비영업직 사원들 가운데 직장에서 영업행위를 강요받는 비율이 40%를 웃도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재팀이 9월15일부터 20일 사이에 서울역 주변에서 비영업직 사원 1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영업행위를 강요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있다’라는 답변이 43명, ‘없다’가 57명으로 나타났다.
‘있다’라고 답변한 43명 가운데 판매 실적이 좋지 않은 경우 어떤 불이익을 받는가라는 질문에 ‘상사의 눈치를 받는다’가 17명(39.5%)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10명(23.3%), ‘퇴사의 위협을 받는다’ 6명(14%), 기타 3명(7%)이었다. ‘전혀 불이익이 없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7명(16.3%)이었다. 기타 3명 가운데는 ‘물건을 못 팔면 퇴근을 못하거나 사원 자신이 상품을 구매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영업행위를 강요받은 경우 대부분 강한 심리적 압박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업행위를 강요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는 질문에 ‘부담스러웠다’라고 답변한 사람이 23명(53.5%)으로 가장 많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8명(18.6%), ‘모욕감을 느꼈다’ 4명(9.3%)이었다. ‘괜찮았다’라는 긍정적인 대답은 8명(18.6%)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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