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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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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도 국가보안법이 싫어요

등록 2004-09-24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버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한국 정부에 보안법 폐지 재차 권고… 국제활동가들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합창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국가보안법 나빠요.”

유엔과 국제 시민단체가 한목소리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했다.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UNHCHR)의 루이즈 아버 인권고등판무관과 국제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들은 9월14일부터 17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7회 세계국가인권기구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유엔을 대표해 전세계 인권 문제를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유엔에서 사무총장 다음으로 무게를 가진 직책으로 평가받는 자리다. 아버 판무관이 입국하자 그가 국가보안법 논란에 대해 어떤 입장을 표명할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내정 간섭 우려하며 말조심하던 판무관도

14일 입국한 아버 판무관은 방문 첫날 국가보안법 문제에 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국내의 국가보안법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자칫 그의 한마디가 ‘내정 간섭’으로 비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아버 판무관은 이날 “한국에서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가 나오는 것 자체가 한국의 인권 상황이 크게 개선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본다”고 ‘중립적인’ 언급만 했다. 더구나 유엔고등판무관실은 한국 국가인권위원회가 요구한 기자회견에 대해 “외교부에서 이미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다”며 사양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아버 판무관은 한국 외교통상부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등이 공동 주최해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열린 유엔 인권세미나 참석을 겸하고 있었다.

아버 판무관은 15일 오전 이해찬 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한국의 안보를 저해하지 않으면서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보안법 폐지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다. 첫날보다 발언의 강도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원칙론’ 이상은 아니었다. 아버 판무관은 이날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국가보안법 수감자 등 한국의 인권 피해자들과 간담회를 했다. 아버 판무관은 “오늘 만남이 한국 방문의 하이라이트”라고 인사를 건냈다. 이날 간담회에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13년을 복역한 황대권씨가 참석해 국가보안법 피해 사례를 증언했다. 황씨는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존재해왔다”며 “유엔 고등판무관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했다. 임기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고문도 “56년 전 만들어진 악법을 없애기 위해 어머니들은 19년 동안 매주 목요일마다 집회를 열어왔다”며 양심수를 상징하는 보랏빛 수건을 선물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국가보안법 피해자 외에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이주노동자, 정보인권운동가, 정신대 할머니가 참석해 자신들의 피해사례를 증언하고,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도움을 요청했다. 황씨 등의 호소를 들은 아버 판무관은 “군위안부부터 정보인권까지 다양한 문제에 대한 여러분의 증언에 압도됐다”고 말했다. 아버 판무관은 피해자들의 증언에 깊은 인상을 받은 표정이었지만,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하지는 않았다.

아버 판무관은 방문 마지막 날인 16일 오전 김창국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과 대담을 했다. 김창국 위원장이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아버 판무관은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분명합니다”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아버는 또 “국가보안법은 국제 인권 기준에 너무나 뒤떨어져 있고, 1992년에 한국 정부가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 협약에 따른 보고서 제출했을 때 유엔 인권이사회는 국가보안법을 단계적으로 철폐해야 한다는 권고안을 분명히 내렸고, 그 뒤에도 인권 피해자들의 제소가 있을 때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라고 유엔의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역사를 상기시켰다.

“유엔은 이미 1995년 ‘폐지’ 결론내”

그는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1995년 의사표현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한국을 방문해 정부 관계자와 피해자를 만나서 내린 최종 결론은 국보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라며 “유엔 입장에서 너무 당연한데 그동안 폐지가 안 된 것이 의아합니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제네바에 사무국을 둔 팍스로마나의 이성훈 사무총장은 “유엔을 대표해 전세계 인권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지구적 양심의 보루인 인권고등판무관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하게 요구한 것은 의미가 크다”며 “국내에서 정쟁의 대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관계자는 “아버 판무관이 전날 인권 피해자들과의 만남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발언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 같다”고 전했다.

세계인권기구대회에 참석한 각국 국가 인권기구 대표 중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모튼 키에룸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은 “국가보안법 존치를 주장하는 것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군사정권 당시 한국에서 통행금지를 해제하면 심각한 범죄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지 않느냐”며 “국가보안법 폐지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서구에서도 사형제 폐지 논쟁 때 폐지 반대 여론이 높았다”며 “정치 지도자들의 강력한 폐지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인권기구대회에 참석한 국제 NGO 대표들은 한목소리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쳤다. 국제 NGO 대표들은 16일 오후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에 참석해 “어볼리시(Abolish·폐지하라), 어볼리시!”를 외쳤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외국 인권활동가 13명은 각 나라 말로 적힌 구호를 직접 써서 들고 나오기도 했다. 외국 활동가들은 국제앰네스티, 국제형사재판소감시연합 등 주요 국제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이었다. 국제형사재판소연합 활동가 에블린 세라노는 국제 인권활동가를 대표해 낭독한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국제연대 메시지’를 통해 “많은 인권활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이 이 악명 높은 법 아래서 구금, 투옥, 고문 그리고 심지어 죽어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며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것은 한국 정부의 의무이며 지금이 국제 사회와의 약속을 이행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세라노는 또 “국가보안법이 완전히 철폐되지 않는 한, 한국은 결코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모범국가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높아지는 세계 시민사회의 목소리

이에 앞서 국제앰네스티는 15일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하게 촉구했다. 라지브 나라얀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연구관은 “국가보안법이 악용돼온 역사를 생각할 때 보안법 폐지는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며 “한국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이번 의회에서 반드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안보 문제가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반대하거나 부인하는 도구로 둔갑해서는 안 된다”며 “국제앰네스티는 지난 8월 헌법재판소가 보안법 7조의 찬양고무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을 비판한다”고 말했다.

세계국가인권기구대회는 17일 ‘서울 선언문’을 채택하고 막을 내렸다. 선언문은 “국가 인권기구들이 안보와 관련한 입법이 인권을 침해하는지를 검토한 뒤 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각국의 국가 인권기구가 국가보안법 같은 법률을 감시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이처럼 세계 시민사회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세계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기지는 일이 한국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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