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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도 탈출구 안보이네

등록 2004-11-18 00:00 수정 2020-05-03 04:23

피로감 보이는 성매매 여성 농성 현장… ‘성매매 허용’ 되풀이 주장에 상황 진전없어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야, 이젠 씹질도 못하냐, 더런 놈의 세상.”

가슴에 태극기를 단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설을 퍼붓고 있다. 서울 여의도 옛 한나라당사 앞에 차려진 성매매 여성들의 농성장에는 이런 정체 모를 남자들이 하루에도 몇명씩 출몰한다.

집창촌 여성들이 성매매 특별법 시행 유예와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한 지 열이틀째인 11월12일, 처음 15명이었던 농성자는 8명으로 줄었다. 업주들, 영등포 경찰서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관심갖는 이들도 없다. 이날 마침 기온이 뚝 떨어져 농성장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은 버스 정류장과 작은 쉼터가 있어 장기 농성자들에게 명당자리로 꼽히는 곳이다. 원래 군 의문사 문제 해결을 요구해온 의문사유가족대책위가 쓰던 자리였는데, 이번엔 하루 차이로 집회 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내주게 됐다.

“가게서 굶으나 여기서 굶으나…”

단식농성장 천막을 들추고 들어서자 침낭에 몸을 묻고 있던 여성들이 손사래를 치며 “저쪽(한터)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만 했다. 출구 없는 장기 농성의 피로와 무력감이 묻어나는 태도였다. 성매매 업주들의 모임인 한터전국연합회 천막이 이들의 농성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한터 천막에는 일회용 커피와 컵라면이 쌓여 있었고,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이모들’이 바람을 피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대뜸 “언론에 아무리 우리 얘길 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라고 불만을 쏟아냈다. 이영자(가명·44)씨는 “불 켜고 (영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순찰차가 앵앵거리고 돌아다니니 손님이 오겠느냐”면서 “가게에 앉아 굶으나 여기 앉아 굶으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성매매 업주들과 여성들은 경찰의 집중단속 기간이 끝난 지난달 24일부터 다시 영업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집창촌 일대는 여전히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성 매수자도 처벌한다는 법 집행 의지가 널리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고려한 탓인지 업주들은 애초 성매매 합법화 주장에서 한발 물러서 △2007년까지 집창촌 규모 3분의 1로 축소 △성매매 여성 인권 보호를 위한 시스템 개발 △창업지원 혜택 등을 다짐하는 자체 ‘구제안’을 정부와 각 정당에 제출했다. 강현준 한터전국연합회 사무국대표는 “여기 나온 애들은 지원시설에 들어갈 수도, 돈 몇십만원 벌이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상황”이라며 “자율적으로 규모를 줄이고 대책을 세울 시간을 달라는 게 우리의 요구”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 국회에서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과 면담을 갖고 이와 같은 주장을 펼쳤으나, “연구해보겠다”는 얘기 외에 뾰족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이들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성매매 허용’을 전제한 탓이다.

지은희 여성부 장관은 11월3일 탈성매매 지원시설에 들어오지 않는 여성들에게도 직업교육과 의료지원, 창업자금 대출 지원 등을 약속했다. 또 부산 완월동과 인천 숭의동의 집창촌은 ‘탈성매매 프로젝트 시범지역’으로 선포했다. 앞으로 시범지역 여성들은 지원시설 입소 여부와 상관없이 기초생활을 할 수 있는 긴급생계지원도 받게 된다. 여성부는 이 두 사업을 위해 올해 예산만으로 우선 13억원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성매매 여성들이 여성단체와 손잡고 한목소리로 탈성매매 의지를 밝히고 지원을 요청한 덕분이다. 이들의 ‘연대’는 지난달 19일 청량리 집회를 마친 뒤 부산 완월동 대표가 한국여성단체연합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러 갔다가, 성매매 근절에 대한 여성단체의 노력을 이해하고 불신을 씻은 것이 계기가 됐다.

명분도 떨어지고, 동력도 떨어지고…

이날 밤 여의도 농성장 주변에는 업소 관계자 몇명만이 나와 있었다. 술에 취한 또 다른 남자가 “내가 대변인”이라고 소리치며 천막 주위를 오갔다. ‘명분’도 ‘동력’도 차츰 떨어지고 있어 농성자들의 밤은 더욱 고달파 보였다. 성매매특별법 시행과 집중단속, 이례적인 성매매 여성들의 거리시위로 불거진 ‘성매매 찬반 논쟁’의 열기만큼 이들을 위한 ‘자활과 지원 대책’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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