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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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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야 반갑다

등록 2004-09-24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 글 · 사진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여물어가는 단수수 씨앗이 새들을 유혹하는 모양이다. 농장주는 “덕분에 새들이 날아온다”고 즐거워했다. 이삭 가운데 몇개는 벌써 새들이 반이나 쪼아먹어 일찌감치 잘라두기로 했다. 나눠달라는 사람이 적지 않아 새들에게 인심을 쓸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주말농장에서 볼 수 있는 새는 극히 한정돼 있다. 그나마 흔한 것은 참새이고, 어쩌다 까치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논 사이로 난 도랑에는 간혹 백로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밭으로 날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얼마 전 흐린 해질 녘에 농장에 갔다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검은 물체들에 깜짝 놀랐다. 수십 마리의 제비떼가 농장 위에서 곡예비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비들은 땅을 스치듯 낮게 날다가 갑자기 하늘로 치솟곤 했다. 어쩌다 한두 마리의 제비를 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 많은 제비를 보기는 십년도 넘었다. 기쁜 마음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제비를 카메라에 담느라 오랫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한때는 제비가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새였다. 한번도 박씨 같은 것을 물어다준 적이 없지만, 봄이면 어김없이 우리 고향집에도 찾아와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다. 바닥에 똥을 하도 많이 싸대서 가끔 막 짓기 시작한 둥지를 부수기도 했지만, 제비는 한번 잡은 터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제비집 아래 판자로 똥받이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타협할 뿐이다. 그래도 마루 위엔 언제나 제비똥이 가득했다. 제비는 참으로 부지런해서, 어느새 알을 낳고 노란 주둥이를 벌려대는 새끼들을 길러냈고, 다시 길을 떠났다. 떠날 때는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앉아 꼭 인사를 하고 갔다.

제비를 생각하면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벼꽃이 필 무렵에는 논에 농약을 칠 일이 있어도 물에 희석시키는 농약이 아니라 가루농약을 쓴다. 그런 날이면 논 가득 제비가 모여들었다. 농약 때문에 벌레들이 논 위로 치솟는 것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처음엔 몰랐으나, 제비들도 점차 농약의 피해를 깨달았으리라. 지금은 농촌에서도 제비를 보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흥부전을 읽어도 제비가 무엇인지 모를 어린이들이 늘어만 간다.

주말농장의 제비들은 어디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것일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농장 주변에서는 제비가 둥지를 튼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젠 번식이 끝났으니 근처 어디 갈대밭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말농장에는 다른 곳보다 제비들이 먹을 게 많아 날아왔으리라는 사실이다. 농약을 하지 않으니 고추잠자리와 배추벌레, 달팽이가 적지 않다. 배추벌레는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잡아줘야 할 판에 제비들이 스스로 날아와 도와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옛 사람들은 제비가 삼짇날(음력 3월3일) 돌아왔다가 중양절(9월9일)에 떠난다고 했다. 떠난 어미 제비는 스물에 하나꼴로 옛집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제비를 봤다는 얘기를 하자, 한 후배가 물었다. “제비들은 가을에 어디로 날아가요?” “강남으로 가겠지.” 별 뜻 없이 대답해놓고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강남은 중국 양쯔강 남쪽을 뜻하는 말인데, 한강 아래 강남이 생각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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