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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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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영혼

등록 2005-02-24 00:00 수정 2020-05-03 04:24

[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 jeje@hani.co.kr

우리 조상들이 차례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은 것은 그 요염한 생김새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울 안에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복사나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가 귀신을 부른다고 어른들은 믿었던 것이다. 어차피 보잘것없는 열매가 열리는 개복숭아나무가 대부분이었지만, 복사나무는 가능한 한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복사나무는 귀신을 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장례식에는 꼭 필요한 나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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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한 노인이 꽃상여를 타고 저승길을 떠나던 어느 날 아침, 나도 복사나무 가지를 꺾어가는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동쪽으로 향해 뻗은 햇가지로.” 장례를 지휘하는 이는 방 안에서 관을 들고 나올 때 복사나무 가지를 관머리에 대고 죽은 이의 육신만이 아니라 함께 데리고 가야 할 얼(魄)을 그렇게 불러나왔다. 빗자루만 한 붓에 풀을 묻혀 붉은 천 위에 글씨를 쓴 뒤 밀가루를 흩뿌려 글씨 위에만 흰색을 입힌 명정이 상여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상여를 따르던 죄인들은 소복에 지팡이를 하나씩 짚었는데, 죽은 이가 남자이면 대나무로 만든 것을, 여자이면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썼다. 어른들은 “남자는 속없는 동물이라 속 빈 대나무를 쓰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대나무와 버드나무는 ‘성’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대나무는 여성이요, 버드나무는 남성이다. 특히 버드나무 지팡이는 손잡이 부분의 껍질을 10cm가량 벗겨낸 모양으로 만든 것을 보면 그것이 남성을 상징한다는 내 생각이 무리한 추측만은 아닐 것이다. 망자가 남자일 때 반대로 여성을 상징하는 대나무를 지팡이로 쓴 것은 죽음의 세계는 음양이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이는 옷고름도 산 사람과 정반대로 매지 않던가.

요즘은 주변에 보이는 모든 나무가 그저 관상수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연에 기대어 살던 시절에는 거의 모든 나무가 나름의 쓰임이 있었다. 단단한 박달나무로는 팽이를 깎고, 닥나무 껍질로는 팽이채를 만들었다. 닥나무가 없었다면 한지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키만 크게 자란 탱자나무 줄기로 테를 삼고, 가는 식대를 이어붙여 광주리를 만들었다. 나무는 단순히 도구를 만드는 재료만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도 봉황이 날아와 쉰다는 ‘벽오동’나무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간직하는 오동나무’(桐千年老恒藏曲)가 자랐다. 목백일홍은 지금도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우리 대신 지키고 있다.

나는 많은 나무들 가운데서도 특히 노간주나무(사진)에 마음이 간다. 서양인들이 그 열매로 ‘진’(Gin)을 만드는 노간주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코뚜레를 만들 때 쓰던 것이다. 힘센 소를 부리려면 코뚜레는 쉽게 부러져서는 안 된다. 소의 코를 꿰는 것이니 껍질을 벗겼을 때 매끈하기도 해야 한다. 거기에 딱 맞는 게 바로 노간주나무였다. 이사갈 때는 그 노간주나무 코뚜레를 갖고 가서 처마 밑에 매달아두었다. 소처럼 탈없이 일 잘하고 태평하기를 비는 뜻에서였다. 겨울 나목들 사이에 서서 나는 이제 그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조차 드물어진, 슬픈 나무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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