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 글 · 사진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 jeje@hani.co.kr
호박을 사러 채소가게에 가보면 색깔이 진하고 오이처럼 길쭉한 주키니호박이나 작은 곤봉 모양으로 생긴 애호박뿐이다. 예부터 심어온 둥근 호박을 훨씬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우 서운한 일이다. 호박 맛은 역시 둥근 호박이 제일이다. 하지만 둥근 호박을 시장에서 만나기 어려운 것은 추위에 약해 비닐하우스 재배가 잘 안 되는데다 수확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몇해 전 귀농한 친구가 모임이 있는 자리에 직접 기른 재래종 풋호박을 한 자루 싣고 와서 나눠준 적이 있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상처 입지 않도록 호박잎으로 포장한 둥근 호박은 운치도 있다.
어른들은 “호박 덩굴은 매를 맞아야 호박이 잘 열린다”고 했다. 호박은 암꽃이 적게 피고 수꽃이 많이 피는데, 너무 잎줄기가 번성하면 결실이 적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풋호박 때 따지 못하고 남은 호박들은 노랗게 익어 멋들어진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우리 주말농장에도 한쪽 밭에 얼마 전까지 늙은 호박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그 밭의 주인은 참으로 멋을 아는 사람이다.
늙은 호박은 쓸모가 참 많다. 삶아먹으면 아이를 낳은 산모의 부기를 빼준다고 해서 요즘도 시어머니들은 출산한 며느리를 위해 꼭 늙은 호박을 챙긴다. 동지가 다가오는 이 무렵이면 호박죽, 호박떡을 만들어 먹는다. 엿장수들이 파는 엿도 반드시 ‘울릉도 호박엿’이다. 울릉도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섬으로 처음 건너간 사람들이 씨앗을 갖고 가서 심었더니 열매도 매우 크고 당도도 높아서 이를 엿으로 고았는데, 이때부터 울릉도 호박엿이 유명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수호박은 최근에 등장한 변종이다. 국수호박은 참외처럼 생겼는데, 호박을 갈라 삶으면 호박 속이 국수 면발처럼 풀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호박 면발을 국수처럼 양념장에 말아먹는다. 밀가루에 반죽해 수제비를 끓여먹기도 한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일부 농민이 재배해 직접 국수집을 경영하는 정도였는데, 지난 여름 동네 할인점에 갔더니 국수호박을 팔고 있었다. 재배면적이 많이 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애초 호박은 씨앗을 먹는 식물이었다고 한다. 클라이브 폰팅은 에서 “호박은 원래 씨를 먹으려고 키웠으나 작물화되면서 씁쓸하던 과육이 달콤하게 바뀌었다”고 썼다. 식물의 용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다고는 해도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믿기지 않는 얘기다. 호박씨는 맛이 제법 구수하다. 어릴 적엔 늦가을 늙은 호박을 썰어 말리면서 씨앗을 챙겨 씻어 말려두었다가 겨울 밤에 일삼아 까먹기도 했다. 한번 입에 넣어보면 자꾸만 먹게 된다. 요즘엔 술집에서 안주로 나오기도 한다.
겉으로는 엉성하고 둔해 보이지만 뒤에서는 실속을 챙기는 사람을 두고 “뒤로 호박씨 깐다”고 한다. 호박씨에는 머리를 좋게 한다는 레시틴(인산기를 포함한 지방)과 혈압을 내려주는 성분이 있다니, ‘실속을 챙긴다’는 비유가 틀리지 않는 것 같다. 호박씨를 까먹다 보면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이 드신 어른을 모시는 사람이라면 호박씨를 좀 장만해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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