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 jeje@hani.co.kr
요즘 내가 주로 머물러 일하는 곳은 과천의 정부종합청사다.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치기 쉽지만, 거기에도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다. 요즘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목백합나무들이다. 나무는 주차장 구획 사이에 많이 심어져 있고, 가로수로도 서 있다. 아마 1982년 청사를 조성할 때, 속성수라는 점을 높이 사 심은 듯하다. 지금은 키가 15m쯤 된다. 겨울이라 그 커다랗던 이파리들을 모두 떨어뜨린 채 벌거벗었지만, 가지 곳곳에 꽃처럼 생긴 것이 많이 달려 있다. 씨앗이다.
춘천여고 교정에 서 있는 거목으로도 제법 알려진 목백합나무엔 6월께 튤립처럼 생긴 꽃이 핀다. 그래서 목튤립이라고도 한다. 씨앗은 색깔만 갈색으로 변했을 뿐 모양이 꽃과 똑같다. 물론 하나하나의 씨앗이 그런 게 아니고, 씨앗들에 달린 날개가 퍼진 모양이 한 송이 튤립처럼 보이는 것이다. 가끔 청설모가 가지를 타고 오르기라도 하면, 꽃이 부서져 씨앗이 우수수 떨어진다. 날개 한쪽 끝에 감춰진 씨앗을 축으로 하여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모양이 귀엽다.
자손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식물들은 씨앗에 여러 장치를 달아놓았다. 들풀인 도깨비바늘, 쇠무릎, 도꼬마리는 사람의 옷이나 동물의 털에 붙어서 다른 곳으로 퍼진다. 단풍나무 씨앗에는 목백합나무 씨앗처럼 날개가 달려 있다. 봉숭아나 콩 종류처럼 깍지가 비틀어 터지면서 퍼지는 것들도 있다. 기껏해야 몇m도 날지 못하니 애처로울 뿐이다. 민들레나 박주가리 씨앗처럼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수십 km씩 날아가는 씨앗들은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요즘 박주가리 씨앗주머니(사진)가 벌어지기 시작할 때다.
그러고 보니 내 방 책꽂이 한켠에도 각종 씨앗들이 들어 있는 상자가 하나 있다. 여름부터 꽃씨를 비롯해 올봄에 심을 종자들을 모아둔 것이다. 채송화 씨앗은 이웃집 정원에서 채종한 것이다. 겹채송화 꽃씨를 모으려던 것인데 꽃이 지고 나니 씨앗만으로는 홑꽃의 것인지 겹꽃의 것인지 구분할 길이 없어 그냥 한 봉지에 담았다. 봉숭아와 나팔꽃도 꽃의 색깔에 따라 구분해두었다. 맨드라미, 족두리꽃, 접시꽃 씨앗도 보인다.
농작물의 씨앗은 대부분 사서 쓰거나 모종을 사서 옮겨심는다. 밭에서 거둔 것은 소독을 하지 않아 밭에 병충해를 퍼뜨리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사고 싶어도 사기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단수수 농사를 지었다고 했더니 여기저기서 씨앗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문의가 왔다. 단수수는 그만큼 귀한 것이 됐다. 강원도 여행길에 얻어온 갓끈동부(꼬투리가 갓끈처럼 길쭉한 동부콩)의 씨앗도 있다. 지난 여름 이 코너에 땅꽈리(애기꽈리)를 오래 못 보았다는 글을 썼더니, 독자 김혜원님이 챙겨주신 씨앗도 나를 미소짓게 한다. ‘살아가는 일이 험하고 등이 시릴 때’ 나는 가끔 씨앗 상자를 열어본다.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은 단순한 씨앗이 아니라, 봄이면 꽃으로 피어나고 가을이면 다시 더 많은 열매들로 되살아나는 희망이다. 씨앗들을 보니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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