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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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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밭의 수수깡

등록 2004-12-31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 jeje@hani.co.kr

왜 겨울농사는 짓지 않느냐고 사람들이 간혹 내게 묻는다. 비닐집을 지어 거기에서 푸성귀를 길러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농사일을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비닐집을 짓는 것부터가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철재를 사지 않고도 대나무를 엮어 만들 수는 있는데, 손이 워낙 많이 간다. 비닐집을 짓는다고 해도 온도가 농사지을 만큼 올라가지 않으니 난방기를 들여놓거나 온상을 만들어야 한다. 온상이란 땅을 파고 그 아래 짚 따위를 넣어 발효시키면서 그 열을 작물 재배에 활용하는 것이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꼭 논밭에 작물을 길러야만 겨울농사인 것은 아니다. 겨울엔 겨울 나름대로 할 일이 있다. 지금이야 다 사라졌지만, 예전엔 새끼를 꼬고 가마니와 바구니를 만들고, 농기구를 정비하는 일 따위가 중요한 겨울농사였다. 요즘 나는 주말농장 주변의 밭들을 구경 다니는 것으로 겨울농사를 대신하고 있다. 겨울밭에도 볼 거리가 참 많은데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수숫대다. 이삭만 베어내고, 혹은 제대로 여물지 못해 그냥 버려둔 수숫대가 곳곳에 없다면 겨울밭은 너무 황량할 것이다.

어릴 적에는 수수깡이 바람개비를 만드는 데 필수품이었다. 종이를 접은 뒤 성냥으로 축을 만들어 수수깡에 꽂고 바람 속을 헤집고 다녔다. 수수깡으로 가장 흔히 만들던 것은 안경이다. 안경을 쓰는 사람이 드물었던 시절, 수수깡 겉껍질을 벗겨 속대로 이리저리 이어붙여 만든 안경을 써보는 것은 그야말로 신나는 일이었다. 어른 흉내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 아니던가. 요즘엔 문구점에서 인조 수수깡을 판다. 매끈하고 자를 때 부스러기가 생기지 않아 좋긴 하지만, 껍질이 따로 없으니 활용도는 자연 소재보다 크게 떨어진다.

사실 밭에 수숫대를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쓸모가 없다. 베어서 묶어놓지 않으면 비나 눈에 젖어 습해지기 때문이다. 잘 마른 수수깡이라야 껍질과 속대를 다 쓸 수 있다. 나는 최근 몇해 동안 겨울마다 쓸 만한 수수깡을 좀 구해볼까 하고 일산 외곽의 밭들을 돌아다녀보았는데, 아직까지는 제대로 된 것을 거의 구하지 못했다. 옥수숫대도 언뜻 보면 수숫대와 비슷하다. 하지만 옥수수 수수깡은 골이 패어 있어 둥글지 못한데다 길이도 짧다. 껍질도 잘 벗겨지지 않는다. 옥수숫대는 그래서 땔감으로나 쓸 뿐이다. 다만 늦가을 푸른 기운이 아직 남아 있을 때는 단수수처럼 속살에 단맛이 배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수숫대를 보니 옛 동화가 생각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떡장수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간 오누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다 그만 줄이 끊어지면서 떨어져 죽는다. 알려지기론 그때 호랑이가 떨어진 곳이 바로 수수밭이었다. 수숫대를 살펴보면 동화를 만들어낸 옛 사람들의 상상력에 정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지금도 호랑이 피가 수숫대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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