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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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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의 계절

등록 2004-12-03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 href=mailto:jeje@hani.co.kr>jeje@hani.co.kr

아무래도 밭이 텅 비는 것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소설이 지났는데도 무와 배추를 거둬들이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만 첫눈이 와버렸다. 그사이 무청이 많이 시들고 배추도 겉이 말라들었다. 좀더 늑장을 부렸더라면 무에 바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짚으로 묶어놓은 배추는 어지간한 추위에는 잘 얼지 않는다. 남부지방에서는 작은 배추를 김장 때 뽑지 않고 비닐로 덮어놓았다가 초봄까지 하나씩 거둬다 먹기도 한다. 봄이 되도록 밭에 남은 배추가 폭 삭은 자리에는 뿌리가 남아 있다. 내 어릴 적에는 배추 뿌리가 먼 길 걸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였다.

올해 우리 밭의 무와 배추는 비교적 농사가 잘됐다. 그런데 그것으로 김장을 할 필요는 없게 됐다. 지난해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키운 작은 배추로 김장을 한 것을 보시고 어머니가 영 맘에 들지 않으셨던지, 올해는 벌써 우리집 김장까지 다 해놓으셨다고 하신다. 그렇다고 수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모두 거둬보니 배추가 한 자루, 무가 한 자루나 된다. 집 가까이 사는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우리는 결구 없는 배추와 무청을 챙기기로 했다.

푸른 무청을 새끼 등으로 엮어 겨우내 말린 것을 시래기, 배추 같은 푸성귀에서 뜯어낸 겉대를 우거지라고 한다. 지난해에는 배춧잎을 엮어 베란다에 널어 말렸다가 낭패를 보았다. 한낮에 햇볕이 들면서 잎이 노래지고 나중에는 종잇장처럼 변해버렸다. 햇볕을 쬐면 엽록소가 날아가버린다는 것을 잘 몰랐던 것이다. 배춧잎이든 무청이든 말려 보관하려면 반드시 그늘에서 말려야 한다. 무청은 그냥 말리기도 하고, 끓는 물에 한번 데쳤다가 말리기도 한다. 한국 조리과학회지(1997년 1월호)에 실린 논문(박세원 유양자, ‘조리전 전처리 방법에 따른 시래기의 무기성분의 변화’)을 보니, 데쳐 말린 것보다는 그냥 말린 것이 훨씬 무기물 함량이 많다고 한다. 데치는 과정에서 뜨거운 물에 무기물이 녹아 빠져나가기 때문이란다.

요즘처럼 냉동창고가 없던 시절에는 가을에 땅을 깊숙이 파고 무와 배추를 묻었다가 봄에 꺼내 먹었다. 요즘엔 무청이나 배추 우거지도 애써 말리지 않고 오래 두고 먹기가 쉬워졌다. 군부대처럼 대량 보관이 필요한 곳에서는 무청을 소금물에 절여두고 쓴다. 끓는 물에 10분가량 데쳤다가 냉동 보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무청이 그리 많지 않은데다 집에는 말릴 만한 곳도 마땅찮기 때문이다. 미리 데쳐 냉동해두면 나중에 요리를 할 때 다시 데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데쳐 말린 시래기를 다시 데쳐서 요리하는 경우보다 무기물 손실이 적다고 한다.

시래기로는 국을 끓여먹기도 하고 나물을 해먹기도 한다. 특히 붕어찜이나 고등어 조림에는 시래기와 우거지를 넣어야 맛이 제대로 난다. 식량이 부족한 시절에는 시래기가 죽을 끓일 때 양을 늘리는 요긴한 재료였다. 시래기를 손톱만 하게 썰어 된장을 걸러 붓고 쌀을 넣어 죽을 쑤는데,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과는 달리 맛이 아주 괜찮다. 겨울철 식당의 별미 메뉴로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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