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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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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만경들

등록 2005-01-19 15:00 수정 2020-05-02 19:24

[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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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 마을은 전북 정읍시 고부면에 속해 있다. 만경들을 북서로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가는 고부천의 상류 두물머리 근처다. 십리 떨어진 곳에 줄포(부안군)가 있을 만큼 바닷가와도 가까웠기에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렸다. 지난주에도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적설량이 고작 6cm라고 한다. 어릴 적엔 눈이 좀 왔다 싶으면 30cm는 내렸다. 평야에 내린 눈도 장엄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하얗기만 한 설막, 그 위로 한낮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는 한달음에 만경들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눈이 많이 내리면 그나마의 농사일도 ‘올스톱’이다. 어머니는 군불을 땐 방 안에서 <동백 아가씨>를 부르며 대나무 바구니를 엮으셨다. 남자 어른들은 주막에 모여 윷놀이를 하거나 화투놀이를 했다. 눈 덮인 들과 숲은 아이들과 청년들의 차지다. 눈이 세상을 온통 덮어버리면 들짐승, 날짐승들은 먹을 것이 없어 지쳐간다. 사람들은 그것을 노렸다. 물론 눈 위에 수많은 발자국을 찍어놓고 사람을 홀리는 산토끼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만한 게 꿩이다.

꿩몰이에는 청년들이 앞장서고, ‘꿩에게 잡힐 듯한’ 소년들과 강아지가 따라나선다. 꿩은 몸집이 무거워 오래 날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쫓기다 지치면 눈 속에 고개를 처박아버린다. 제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사람도 자기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꿩을 몇 마리 잡기라도 한 날은 닭서리에서 해방된 닭들이 편안히 잠을 자는 날이었다. 요즘엔 꿩몰이가 사라졌다. 마을에 청년이 씨가 마르기도 했지만, 꿩들이 더는 희생양이 되지 않게 진화했다는 게 어머니의 해석이다. “옛날 꿩은 나무 위에 앉지 못했는데, 요즘 꿩은 쫓기면 나무 위에도 앉는다.”

소년들이 꿩몰이에 따라나서는 것은 장끼(수꿩, 암꿩은 까투리)의 화려한 꽁지깃을 얻으려는 것이다. 사실 아이들에겐 꿩은 버겁다. 만만한 게 참새다. 세대를 거쳐 이어져온 참새 잡는 법은 이렇다. 눈 내리기 전 마당 한쪽에 대문짝을 놓아두었다가 눈이 내린 뒤 대문짝 한쪽을 30cm가량 들어올려 나뭇가지로 받친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새끼줄을 매달아 참새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져간다. 대문짝 밑에는 참새를 유혹할 볍씨를 넣어둔다. 참새가 볍씨를 먹으려고 대문짝 밑에 들어가면 새끼줄을 잡아당겨 참새를 잡는 것이다. 조금 잔인했나? 어차피 그때는 우리도 ‘야생동물’이었다고 변명하자.

요즘보다 겨울이 한참 추웠던 시절, 그렇게 뛰어놀다 보면 손·발가락이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동상에 걸린 것을 ‘얼음이 박혔다’고 했다. 부어올라 가려운 동상 부위는 아주 심하면 잘라내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가벼운 동상을 치료하는 데 특효약이 있었으니까. 가마솥에 물을 붓고, 텃밭에 쌓아둔 가짓대(사진)를 넣어 끓이면 진한 커피색 물이 만들어진다. 그 뜨거운 물에 손발을 오래 담그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 동상은 씻은 듯이 나았다. 눈 내린 만경들이 그립다. 동상이 걸리도록 한번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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