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그녀가 여름마다 남성용 중절모와 작은 담요를 챙겼던 까닭은
▣ 김경/ 패션지 피처 디렉터
오랜만에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의 사무실에 놀러갔다. 친하기도 하거니와, 그의 남다른 디자이너 감각은 언제나 그의 남다른 라이프스타일에서 나오기 때문에(다르게 표현하면, 그는 디자인 작업을 위해 값비싼 체험에 막대한 돈을 쓰며 스스로 즐길 줄 아는 인간이다) 그가 새로 구입한 물건들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나누다 보면 쏠쏠한 쓸 거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는 사무실에 쪽방을 만들어 오디오 룸으로 쓰고 있었는데, 그 공간이 차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건강상 금주라는 생지옥에 갇혀 살던 그가 최근 천신만고 끝에 알코올을 대신해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을 찾아냈는데, 그게 바로 차(茶)였다. “앞으로 차가 술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줄지도 모르겠어. 요전에 차를 마시며 내게 술은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어. 태초의 나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 같은데, 차를 마시며 그 몸부림이 좀 고요해진 같기도 해.” 즐거움을 위해 살던 쾌락주의자가 어느새 오도송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불도의 진리에 관심 갖게 되면서 최근 불상 같은 것도 모으고 있다고 했다.
아니, 그런데 저게 뭐지? 그는 부처의 자비로운 손 조각품을 모자걸이로 쓰고 있었다. 예전에 플립 스탁이 만든 재떨이에 담뱃재를 터는 모습을 보고 내심 놀랐더랬는데, 이제는 아예 예술과 종교, 그 모두를 소모품처럼 소비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거창한 명분이 있었던 건 아니야. 여름이잖아.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 앉아서도 그걸 즐기고 싶어서 그냥 중절모를 부처님 손 위에 올려놓은 거야. 게다가 생각나는 여자도 있고 해서….”
예전에 마영범이 잘 알고 지내던 어떤 여자는 여름이면 자동차 위에 남성용 중절모를 올려놓고 다녔다. 자동차 뒷좌석에는 작은 담요도 한장 있었다. “멋진 여자였지. 팻 메스니의 <are you going with me> 같은 게 그냥 폼이 아니더라고. 그 여자는 느닷없이 밤에 동해로 떠나곤 했는데, 담요는 쌀쌀한 바닷가에서 사용하고, 중절모는 아침에 서울로 돌아올 때 햇빛 차단용으로 쓴다더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회사 앞 덕수궁 길을 산책하다가 그 중절모 여인처럼 여름을 멋지게 즐기고 있는 커플을 만났다. 분수대 근처였는데 두 남녀가 벤치에 마주 보고 앉아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꽤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던 그들은 하얀 조각보에 와인잔, 작은 휴대용 스피커까지 준비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다고 한다. 나도 여름 준비를 대충 해놨다. 제일 먼저 밥 말리의 히트곡을 모은 CD부터 샀다. 그의 레게 음악을 들으면 따가운 햇살 아래 무방비로 누워 있어도(예를 들면 배 갑판 위) 나른한 천국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얼음 분쇄기를 샀다. 소량의 알코올과 얼음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고 손에 잔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라임 슬러시나 진 피즈, 와인 빙수 등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다. 특히 와인 빙수는 정말 간단하다. 잘게 부순 얼음에 레드 와인과 우유를 조금만 부어주면 된다. 좀더 욕심을 낸다면 줄무늬 비치 체어도 하나 사고 싶다. 그곳에 앉아 셰익스피어를 읽다가 졸리면 자고, 자다 깨면 라임 슬러스를 먹고 발톱에 트로피컬 컬러의 매니큐어를 바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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