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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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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화’는 없다/ 안정애

등록 2004-05-06 00:00 수정 2020-05-02 04:23

오등은 자에 아 대한민국의 여성정치 세력화의 원년임을 선언하노라.

축하드리오.

이 땅의 모든 여성의 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당신. 민족대표 33인처럼 비장한 각오로 17대 국회에 임할 것으로 믿습니다. 여성의 의식은 신장되는 반면 여성의 능력은 사장되는 현실에서 당신에게 지워진 짐으로 인해 참으로 어깨가 무겁겠구려.

여성 국무위원에 들썩인 게 엊그제인데…

바야흐로 여성정치의 세력화가 이 땅에 실현되고 있습니다. 비록 지역구보다는 비례대표가 훨씬 많고, 이들이 기존 남성정치의 후원을 입은 측면이 없지 않지만,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이 16대의 5.9%에서 두배 이상 증가하여 10%대를 기록하였고, 비례대표 50% 여성할당이 법제화된 이번 국회는 여성정치 세력화의 원년으로 기록될 만합니다. 이 정권 초기에 국무위원이 4명씩이나(?) 된다고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 새롭군요.

그런데 이번 총선결과가 여성정치 세력의 주류화(mainstreaming)라는 용어로 쓰여서는 곤란합니다. 정권의 정통성이야 어떻든 못 가진 자야 어떻든 나 혼자만 잘먹고, 잘살고, 사회적인 온갖 명예를 다 누렸던 자들이 외쳤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의미의 주류화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성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양성평등 정치의 실현이지요. 기존의 국회가 온통 남성 위주의 편향된 파행성의 정치였다면 이젠 그것을 균형적으로 발전시켜, 잿빛과 검은색이 아닌 상큼하고 화사한 색으로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먼저 이 땅의 그릇된 가부장제와 왜곡된 자유주의, 그리고 개발독재와 산업화의 희생자가 된 많은 여성들을 위해서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꼼꼼히 헤아리길 바라오. 그들의 눈물과 한숨과 탄식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십시오. 대학교에 입학하여 흐드러진 봄꽃의 향연에 취해 있던 무렵, 처음으로 데모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히틀러도 감히 범하지 않았다던 숭고한 지성의 상아탑에까지 민주화 탄압의 검은 그림자가 손을 뻗쳤던 유신 말기, 유인물 한장만 쥐고 있어도 이른바 짭새(?)에게 끌려가던 시절, 선배 언니들은 기습 데모를 하면서 소리쳤습니다. “너희들이 맛있게 먹는 얼음과자는 수많은 너희 또래 여공들이 동상에 걸려가며 만든 것”이라고.

지금은 모든 공정이 기계화되어 그때 그 선배 언니 말처럼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아이스크림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먼 옛날, 궁중에서 한여름에 쓸 얼음을 구하기 위해 동빙고, 서빙고 일대에 사는 백성들이 겨울에 손발이 잘릴 정도로 심한 동상에 걸려가며 부역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민초들의 죽음을 무릅쓴 고역 위에 세워진 지배자들의 부귀영화. 자칫 그런 모습으로 비치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하고, 빚 갚는 심정으로 정치에 임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세상은 시끄러운 웅변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허장성세와 과시와 허영을 배척하고, 진지한 자세로 소박하고 단출하게 문제에 접근해 해결책을 찾는 겁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제로섬 게임의 논리는 남성 논리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더불어 같이 잘살아” 나가는 보살핌과 돌봄과 살림의 정치 논리를 만들어봅시다. 그동안 여성문제를 의제로조차 올리지 못했던 과거 국회는 장사지냅시다. 남성 중심의 당 운영 시스템에 매몰되어서 “여성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모일 시간조차 없다”는 변명은 이제 허용되지 않습니다. 구차하게 남성들의 장식이나 되라고 당신들을 뽑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젠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서 그동안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산적한 수많은 여성문제를 차분히 풀어나가란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고 생각돼왔던 정치, 군사, 외교의 영역에 과감히 도전하여 여성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하십시오. 남성화되고 위계화되고 폭력화된 안보논리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당신들의 힘을 모아 여성주의적 대안 제시를 위해 노력하십시오.

당신들은 평화를 책임지는 여성대표

당신들이 모여 여성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하는 자리는 참으로 부드럽고 평화스러울 겝니다. 원탁으로 배치된 회의석에서 제비뽑기로 의장이 되고, 평화로운 명상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토의는 치열하고 진지하게, 소수의 의견이라고 다수가 깔아 뭉개지 않으며, 끝나면 룸살롱이 아닌 소박한 곳에서 서로가 준비한 다과를 감사하게 나누는….

여성대표로 나선 당신. 이 땅의 여성, 아니 전 한반도를 대표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평화를 책임지는 여성대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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