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철도청은 철길만 신경쓴다?

등록 2004-04-08 00:00 수정 2020-05-03 04:23

고속철 명분으로 용산 민자역사 지어놓고 도로 터 제공 거부… 용산구청쪽 “교통난 불보듯” 맹비난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4월1일 ‘꿈의 열차’ 고속철도가 개통하면서 서울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은 아마도 용산일 것이다. 여기에 용산 미군기지 이전 발표와 맞물려, 일제 침략·해방과 미군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잊혀진 땅’ ‘단절된 땅’이었던 용산 일대엔 요즘 곳곳에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느라 크레인이 높게 솟았다. 분양권 당첨이 로또만큼 어렵고, 분양권 프리미엄만 해도 최대 4억원으로 치솟는 시티파크의 이상열기야말로 용산에 쏠린 기대와 관심을 잘 드러내준다.

5만명 이용객이 20만명으로 늘어나는데…

이 가운데 민자역사 건설이 막바지에 이른 용산역은 서울의 관문, 교통의 핵으로 꼽힌다. 이곳은 고속철도 호남선의 시발역이자 경부선 고속열차가 1시간마다 정차한다. 1호선 전철을 곧바로 환승할 수 있고 가까이엔 4호선 지하철 신용산역이 있어 서울 시내를 이동하는 데도 편리하다. 다섯달 뒤인 9월1일에는 역사 내에 전자백화점·이마트·멀티플렉스 영화관 등 상업시설이 문을 연다. 전자상가를 제외하곤 대규모 상업·문화 시설이 없던 이 지역에서 용산역 일대는 가장 번화한 곳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용산역 안에 자리잡은 14만평의 공작창이 이전하면 대규모 국제업무단지로 바꾼다는 그림도 한창 구상 중이다.

교통의 요충지이자 상권의 중심지가 될 용산역사는 거대한 몸집으로 불어났지만 주변 교통 상황의 개선은 미미한 형편이다. 한강로에서 용산역쪽으로 들어가 역사 앞을 통과하는 기존 도로는 너비가 10m 남짓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소화기관과 배설기관의 용량은 그대로인데 배가 터져라 갑자기 음식 섭취량만 세배·네배 늘린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문제의 발단은 2000년 말 용산 민자역사 사업 승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철도청은 11개의 영화관, 전자전문백화점 2곳, 할인매장, 주차장 등을 갖춘 상업시설이 전체 면적이 86.9%에 달하는 민자역사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서울시와 용산구청쪽은 기존 역 광장이 대폭 줄어들고 교통난이 심각해진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에 대해 철도청의 상급기관인 건교부는 줄어든 광장과 좁은 길이 가져올 문제점들에 대해 공감하며, “앞으로 재개발 때 적법한 절차에 따라 공공 용지를 제공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고속철도 개통과 때를 맞춰 용산 민자역사가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보다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속에서 민자역사 사업은 계속 진행됐다. 그리고 역사 터를 도로쪽에 보태 버스와 택시 승강장이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는 선에서 사업승인이 났다. 당시 교통영향평가에 따르면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하루 20만명, 상업시설까지 문을 열면 모두 40만명이 용산역을 이용하게 된다는 예측이 나왔다. 그러나 나중에 철도청 공작창이 이전한 뒤 국제업무단지가 개발되면 여기에 너비 40m 간선도로를 낸다는 ‘장기적 전망’에 따라 적절히 타협점을 찾았다. 기존의 하루 5만명 승객만으로도 붐비던 용산역 주변 도로가 포화상태가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데도 민자역사가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철도청 “용지 무상제공 규정 없다”

사업승인이 나고 몇달 뒤 민자역사 주변 계획이 수립됐다. 2001년 7월 서울시는 용산 부도심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면서, 용산역 앞 도로 건너편 상가 6만2500㎡를 특별설계구역으로 정해 이후 재개발 때 너비 30m의 도로를 내도록 했다. 본래 이 땅은 일제시대 철도 개발 때부터 철도청이 용산 지역에 광대하게 소유했던 땅 중 일부인데, 철도청은 대부분을 매각하고 나머지 이면도로(총면적 1만7200㎡·5200평)를 소유해왔다. 철도청 소유의 이면도로만 해도 이곳에 있는 정부·지자체 소유지 중 절반을 차지하는 면적이다. 용산구청과 주민들은 “적법 절차에 따라 공공용지를 제공하겠다”는 건교부의 말을 ‘무상 제공 약속’으로 철석같이 믿고 재개발을 추진해갔다.

그러나 이후 민자역사 준공이 가까워지면서 철도청의 태도는 철옹성처럼 굳어졌다. ‘법적으로 철도청 땅을 무상 제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철도청 땅은 ‘기업용 재산’이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의 사업에 공짜로 제공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철도청 재산과 박곤 팀장은 “국유재산법과 도시개발법에 따르면 국가사업을 자치단체가 이어 받았을 때나 저소득층 주거환경 개선사업일 경우에만 정부 재산을 무상으로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경우엔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재경부도 일찍이 국유재산으로 무상 귀속할 때 회계에 큰 영향을 끼칠 경우에는 무상 귀속을 안 할 수도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게다가 철도청은 회계법상 정부 기관도 아니다. 우리는 ‘기업’이다. 철도청은 이전에도 재산을 무상 제공한 일은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용산구청쪽은 의견이 다르다. 용산구청 도시정비과 이재문 팀장은 “고속철도 공사나 민자역사 건립 같은 중요한 역세권 개발을 할 때엔 공원과 도로 같은 도시 인프라가 함께 마련돼야 하는데, 용산역사의 경우 시간이 촉박해 주변 계획을 세우기 전에 먼저 사업승인이 나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또 “미리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나중에라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철도청의 태도가 너무 완강하다”고 덧붙였다.

역 앞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주변 재개발이 빨리 이뤄져야 하는데, 철도청이 땅을 주지 않는다면 재개발에 빨간불이 켜진다. 철도청 땅이 무상 제공되지 않을 경우 이곳 조합원들은 공공용지 부담률이 12%에서 40%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재개발 지역의 절반에 가까운 땅을 도로로 내놓는 출혈을 감수하면서 개발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용산구청 도시정비과 이봉호 과장은 “철도청은 법적으로 무상 제공 규정이 없다며 땅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건교부는 2천평을 내놓기로 이미 합의했다. 고속철도를 명분으로 역사를 대규모로 지어놓고 도로 터를 내주지 않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이것이 부처 이기주의 아니고 무엇인가”라며 불만스러워했다.

“1년만 버티자” 속셈인가

철도청쪽은 이런 비난에 대해 어차피 2005년 1월엔 철도청이 공사로 바뀌면서 재산이 건교부로 넘어가니 그때 건교부와 합의하면 될 일이라고 응수한다. 앞으로 1년만 더 버티면 된다는 것이다. 철도청의 한 관계자는 “민자역사 때문에 길이 막힌다고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이미 사업승인 때 논의된 것 아닌가”라며 이렇게 말했다. “건교부는 어차피 도로까지 담당하는 기관 아닌가? 1년 뒤 건교부가 결정하면 된다. 우리는 철도청이므로 철길만 다룰 뿐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