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테레비’ 같았다. 1월31일 밤 11시께,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를 들으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로 간신히 일요일 저녁의 우울증을 달랬는데… 웬 낯선 ‘가수’가 한국방송 에 나와 팝송을 부르고 있었다. 사회자 배철수의 소개에 따르면 “자칭 4집 가수”라는 그는 한 곡도 아니고 두어 곡의 노래를 잇따라 불렀다. 처음엔 아니 이런 ‘분’이 이런 프로에 나와서 노래를 하다니 신기해하며 듣다가, 아무래도 프로라고 하기엔 부족한 실력에 조금씩 짜증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건 ‘돌아온 쌍팔년’ 같았다.
나중에 그분의 활발한 방송 활동에 더욱 놀랐다. (2009년 10월3일), (11월21일), (12월31일), (2010년 1월13일), 이렇게 넉 달 사이에 5번이나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것이다. 스스로 “히트곡 없는 4집 가수”라고 말하는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2009년 9월 새 앨범 을 발표하는 쇼케이스에서 “연예오락 프로그램에 가수로 불려가는 것이 소망”이라고 절실한 희망을 피력했는데, 은 히트하지 않았어도 그의 희망은 이뤄졌다.
원래는 정 의원의 출연이 예정돼 있었으나 지나친 겹치기 출연으로 눈치가 보였는지 애석하게 출연자에서 제외된 에는 “행동하는 도지사” 김문수 경기지사, “활짝 웃는” 주호영 특임장관, “의리로 뭉친 국민의 친구” 정진석 한나라당 의원이 나란히 나왔다. 아, 이렇게 여당 정치인이 각종 방송에 불쑥불쑥 나오는 옛 시절이 다시 왔다.
그립지 않은 1980년대는 뉴스와 시사를 넘어 예능과 오락에도 돌아왔다. 지난 1월4일 시즌2를 시작한 는 “새해를 맞아서 법무부와 함께 세계의 교통문화 에티켓을 비교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진행자의 말로 시작해 저절로 손이 리모컨을 찾도록 도왔다. 그렇게 시작된 방송의 끝에는 “이귀남 법무부 장관님의 말씀 잠시 들어보시죠” 하는 소개와 함께 등장한 “장관님”이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서…”라고 고색창연한 말을 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민임동기 〈PD저널〉 편집국장은 “이렇게 방송 전반에 ‘관 냄새’가 퍼졌다”며 “예능 프로에 장관이 나오는 퇴행적 하이브리드”라고 요약했다. 이어 1월31일 방송된 에는 정말 ‘쌍팔년’도 노래가 나왔다. 88올림픽 당시 그룹 코리아나가 불렀던 부터 까지 메들리처럼 이어졌다. 이날 방송은 원전 수주 특집으로, 아나운서도 애국가스러운 대사로 닭살을 돋게 했다.
차라리 이렇게 용비어천가스러운 방송은 시청자의 반발을 부른다. 정작 문제는 시사교양에서 시사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방송 같은 사회비판 프로그램이 사라진 자리에 성공을 앞세운 휴먼 다큐 전성시대가 열렸다. 한국방송에선 같은 강연 프로가 시작됐고, 문화방송에서도 1990년대 스타일로 휴먼 다큐와 재연 프로를 뒤섞은 이 방영 중이다. 이렇게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휴먼 다큐의 잔잔한 목소리에 가려 약자들의 절규가 전파에 실리지 않는다. 민임동기 편집국장은 “요즘엔 뉴스와 교양 프로가 오히려 예능에 비해서도 리얼리티가 떨어져 보인다”며 “오죽하면 에서 숨은그림찾기처럼 현실 풍자를 찾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러니 게시판에는 “KBS에서 제일 볼 만한 시사가 ‘동혁이형’이라니…”라는 시청자의 푸념도 올라온다.
“KBS에서 제일 볼 만한 시사 프로는 ‘동혁이형’…”이명박 시대의 포맷처럼 보이는 방송도 있다. 지난 2월 초 시작된 한국방송 토크쇼 에서 이상한 아우라를 보는 이들이 있다. 시청자의 질문을 모아 출연자가 대신하되 제작진이 질문을 거르는 의 진행 방식과 패널 배치가 이명박 대통령의 와 닮았단 것이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소통을 강조하고 소통에 필요한 엑스트라(시민과 시청자)들은 많이 등장하지만 출연자와 직접적 스킨십은 제작진이 통제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진화하는 예능 프로 형식의 흐름에서 벗어나 과거의 포맷으로 돌아간 듯한 프로도 있다. 한국방송에서 새로 시작한 처럼 2000년대 중반에 끝난 스타의 지인을 찾아주는 형식의 프로그램이 재등장했다. 이렇게 스타를 다루는 일부 프로의 방식도 옛날로 회귀했다.
방송의 개방적인 공간을 닫고 세련된 부분을 깎아내는 대신 전통을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에선 진행자와 초대손님이 해야 하는 미션이 있는데, ‘우연히도’ 미션들이 한결같이 전통적인 것이었다. 진행자인 소녀시대 태연은 거리에서 오고무를 추었고, 김승우는 장구를 쳤고, 2PM 우영은 부채춤을 추었다. 최지은 기자는 “이들의 장기도 아닌데 굳이 왜 80년대 같은 미션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3월에 시작한 문화방송 드라마 도 1회에서 하필이면 하와이로 출장 간 강태호 회장(김용건)의 환영 파티에서 오고무, 태권도 시범이 나왔다. 이렇게 전통의 강조는 종종 보수화의 징후로 읽힌다.
바야흐로 드라마엔 ‘부자의 성공시대’가 열렸다. 이름부터 노골적인 은 3월 초 첫 방송부터 부자가 부자인 이유에 초점을 맞췄다. 인수된 회사로 가기를 거부하는 노동자의 시위현장에 등장한 재벌 상속녀인 주인공 이신미(이보영)는 “왜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이렇게 버티면 밥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라고 말한다. 이신미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머리카락”을 가위로 싹둑 자르면서 자신의 진정성을 과시하자 노동자들이 변심해 이신미 뒤로 줄을 섰다. 은 이신미의 검소함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으로 그가 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름도 하필 ‘오성’그룹,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변하는 기업의 이름으로 너무나 상징적이거나 노골적이다.
무모한 간섭으로 무한한 재미를 죽이는 중앞서 가 있었고, 지금 이 있고, 앞으로 가 있다. 한국방송 드라마 는 ‘오비이락’으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종친회장인 경주 최씨 집안을 다뤄 제작 의도를 의심받았다. 여기서 경주 최씨는 조선시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한 부자 집안으로 묘사됐다. 한국방송 도 제목부터 상업을 통해 부자로 일어선 여성에 대한 이야기고, SBS에서 5월 방영 예정인 는 1960~70년대 서울 강남 지역 개발을 배경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인물을 다룬다. 드라마의 내용이 알려지자 “대통령 찬양이 우려된다”며 드라마 무산 청원이 다음 아고라에 올라왔다.
이렇게 드라마는 부자를 찬양하고 다큐는 성공을 전파하는 사이에 새로운 감성의 드라마는 활자로 남았고 사회비판은 숨죽여 있었다. 강명석 평론가는 “관 냄새는 다른 것이 아니다”라며 “요즘 트렌드와 상관없는 것이 방송에 나올 때, 이것이 왜 나왔을까 생각하게 되고 관 냄새를 맡게 된다”고 말했다. 는 시청률 10%를 겨우 넘는 고전 끝에 종영을 맞았다. 요컨대 이렇게 시장의 흐름과 다른 드라마가 전파를 차지하면 정작 편성돼야 할 드라마가 편성될 자리를 잃는다. 결국은 재미없는 텔레비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무모한 간섭은 무한한 재미를 죽인다. 이제 뉴라이트 단체의 압박은 시사와 뉴스를 넘어 예능과 개그에까지 뻗쳤다. 보수 단체인 방송개혁시민연대는 ‘동혁이형’의 샤우팅에 무소불위 포퓰리즘 딴죽을 걸었고, 앞서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의 내용에 도전했다. 이에 화답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지적질’로 “빵꾸똥꾸”도 눈치 보며 써야 하고, “돌+I(아이)”도 인신공격 아닌가 자기검열 해야 했다. 게시판엔 “동혁이형은 기죽지 말라”며 혹시 그의 샤우팅이 주춤할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올라온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방송의 질에 영향을 끼친다.
한류 콘텐츠의 바탕에는 아시아에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드문 국가인 한국 사회의 ‘다이내믹함’이 깔려 있었다.
문화방송 교양국의 한 PD는 “예능이든 드라마든 변화의 분위기에서 비교적 안팎의 제한 없이 소재와 주제의 상상력을 넓히던 시절이 있었다”며 “비록 방영 이후에 표현이 지나치단 사후적 비판을 받을지언정 자유로운 분위기가 새로운 프로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감성의 드라마 작가 노희경과 인정옥이 등장한 것도 정권 교체가 이뤄진 1990년대 즈음이었다. 당시에 더불어 드라마 감독의 작가론도 등장했다.
“방송 장악한 그분들, 부디 세련돼졌으면”그러나 돌아보라, MB 시대 2년 동안에 드라마 시장에 활력이 있었는지. 들썩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차라리 오락 프로그램은 돌려서 말하거나 시대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그나마 활력이 있었다. 그런데 이마저 오른쪽 손가락의 지적질로 흔들리고 있다. 이제 마저 끝났으니 무슨 재미로 사는가? 정말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서 돌아온 드라마 를 봐야 하는가? 민임동기 〈PD저널〉 편집국장은 “낙하산 사장 문제를 떠나서 방송이 재미가 없어진다는 것은 근본적 문제”라며 “방송을 장악한 그분들이 부디 세련돼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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