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처럼 4년마다 한 번씩 전세계 애주가 경연대회, 특히 맥주 경연대회가 열린다면 장담하건대 월드컵만큼 치열할 거다. ‘누가 많이 마시나’ 부문의 유력한 우승 후보는 쉬지 않고 맥주를 들이켜는 배불뚝이 독일 아저씨 부대와 혼자 앉아서 소리 없이 강하게 맥주를 마시는 일본 직장인 부대. 대한민국 대표선수는 맥주에 소주나 양주를 섞어 마시는 ‘폭탄’ 부문과 노래를 하면서 술을 마시는 ‘음주가무’ 부문의 유력한 우승 후보다. 그렇다면 영국은? 영국에는 술집 펍(Pub)을 하루 종일 사수하는 아저씨·아주머니 군단이 있다. 이들은 ‘누가 꾸준히 오래 마시나’ 부문의 1순위 우승 후보다.
영국에는 모든 지역에 동네 혹은 거리를 대표하는 펍이 하나씩 있다. 런던 도심의 펍은 젊은이들이 주 고객이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도 펍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으로 추정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다. 우리 동네에도 펍이 있다. 학교에 갈 때 이 펍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데, 종종 아침 9시30분에 펍 한구석에서 거의 비어 있는 맥주 파인트 잔을 앞에 놓고 무가지 신문을 보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 보면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비슷하게 생긴 친구들과 TV로 축구 경기를 보거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 몇 잔의 맥주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모습을 보면, 펍이 한때는 노동계급의 공론장으로 ‘시민회관’ 같은 구실을 했지만, 이제는 알코올중독자만 대량생산해내는 대책 없는 술집 내지는 ‘노인정’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난해 말 두 개의 공연에 다녀왔다. 하나는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 로스’의 공연이었고, 또 하나는 영국 록밴드 ‘더 쿡스’의 공연이었다. 시규어 로스의 공연이 열리는 알렉산더 팰리스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내가 공연장이 아니라 맥주 페스티벌에 잘못 온 줄 알았다. 대부분의 관객이 손에 맥주잔 혹은 와인잔을 들고 공연장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본 공연이 시작하자 그제야 맥주잔을 손에 쥐고 공연장에 들어갔다. 그래도 시규어 로스는 제법 점잖은 음악이니 다행이었다. 방방 뛰는 음악을 하는 더 쿡스의 공연이 열린 브릭스턴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관객이 맥주에 취해 있었고, 기분이 마냥 ‘업’된 젊은이들이 날뛰었다. 얼마나 많은 관객이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봤는지는 공연이 끝난 뒤 공연장 바닥을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메운 플라스틱 맥주잔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사진).
이 젊은이들은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 밖에서 한 차례의 난동을 더 부린 다음 삼삼오오 펍으로 향한다. 축구 경기를 보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축구 경기나 록 공연을 본 다음 펍에 가는 평범한 영국 젊은이들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아침부터 펍을 지키는 사수부대로 변신한다. ‘술은 취해야 맛’이라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대표선수들이 보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이들은 굉장히 효율적으로 술을 마신다. 오랜 시간 동안 몇 병의 소주도 아닌, 몇 잔의 맥주만으로 비용 대비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것, 알코올중독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것만 빼면 꽤 경제적인 음주 습관 아닐까.
안인용 기자 한겨레 ESC팀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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