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죽자, 이 새끼야!”
정글 한가운데서 김 중사가 악을 썼다. 소대 2인자인 향도하사관이다. 그는 M16 소총을 들어, 미군 메디백(Medevac) 조종사의 이마를 겨눴다. 철커덕. 노리쇠까지 장전했다. 오른손 검지가 방아쇠에 닿았다. 미군 조종사는 사색이 되었다. 메디백은 환자를 수송하는 헬리콥터다. 동맹군인 한국군을 돕기 위해 급히 날아왔는데, 오히려 소총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M16을 든 중사의 험악한 표정과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봐서는 정말 쏠 것만 같았다. 조종사와 처음부터 실랑이를 벌이던 소대장 최영언 중위가 나섰다. “그러니까, 그냥 다 실읍시다.”
미군 조종사 위협해 부상병 후송소대는 적의 로켓 공격을 받았다. 탐색작전 중 베트콩으로 보이는 10여 명을 발견하고 그들의 뒤를 쫓아온 터였다. 서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온 탓일까. 사방은 갈대숲이었다. 적의 로켓은 아군 병력을 정확히 타격했다. 6명이 쓰러졌다. 아예 일어나지 못하는 중상자도 있었다. 다행히도 무전 연락을 받은 미군 헬리콥터가 바로 도착했다. 다 실어보내야 했다. 부상자를 교대로 부축하며 그들이 지녔던 소총과 배낭과 각종 장비를 나눠들고 갈 여력은 없었다. 적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었다. 미군 조종사는 고개를 저었다. 헬리콥터가 낡아 부상자 전원을 실을 수 없다는 거였다. 두 사람만 가능하다고 했다. 설득을 해봤지만 안 통했다. 이럴 때 해결책은 하나였다. 우격다짐.
청명한 하늘 위로 헬리콥터가 솟구쳐 날았다. 귀청을 찢던 프로펠러의 소음이 멀어졌다. 조종사는 굴복했다. 한국군 해병들의 ‘부상자 전원 후송’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6명은 짐짝처럼 다 실렸다. 좁은 뒷좌석에 덜 다친 병사들을 먼저 눕게 했다. 중상자들은 닥치는 대로 그 위에 포갰다. 장비도 몽땅 욱여넣었다. 최영언 중위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1968년 3월2일, 그날 오후 잠시 멘붕에 빠졌던 소대장과 소대원들은 정글을 성공적으로 빠져나와 안전한 거처로 이동했다.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은 꽝남성 일대에서 괴룡 2호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최영언 중위는 베트남에 온 지 4개월째였다. 제1대대 1중대 1소대장을 맡고 나서 두 번째로 참여하는 작전. 1월30일부터 2월29일까지 전개한 괴룡 1호 작전이 베트콩의 ‘뗏 공세’(구정대공세)에 대한 반격을 목표로 삼았다면, 괴룡 2호 작전은 ‘잔당 소탕’에 주안점을 뒀다. 괴룡 1호 작전으로 적의 기반이 어느 정도 와해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3월2일은 그 첫쨋날이었다. 운이 나빴다. 된통 당했다.
그날 1소대가 공격받기 직전 다른 소대에선 작은 전과를 올렸다. (국방부)는 이렇게 기록한다. “중대는 일대의 낡은 가옥을 샅샅이 수색하던 중 동굴 1개를 발견하여 주변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동굴 안으로 사람이 들어간 흔적이 엿보여, 사면을 포위한 다음 동굴 안을 향하여 투항할 것을 외쳤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므로 수류탄을 투척하고 확인한 결과, VC(베트콩- 필자) 1명이 죽고 CAR 소총(카빈소총- 필자) 1정과 수류탄 7정을 노획하였다.” 동굴 앞에서 투항을 권고했다지만, 동굴 속의 베트남인은 한국말을 알아들었을까. 상대를 죽이겠다는 고함으로만 느끼지 않았을까. 무서워서 나갈 엄두를 못 냈으리라. 동굴 밖에서 수류탄을 든 병사도 두려움에 떨긴 매한가지였다. 안에 누가 있는지, 무기는 갖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작전을 나가면, 최영언 중위의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됐다. 대한민국도, 고향 부산도, 공무원인 아버지도, 늘 자식 걱정을 하는 어머니도, 대학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세 동생도, 친구도 모두 지워버렸다. 그저 오늘 하루만이 중요했다. 괴룡 1호 작전 때는 한 달 동안 기지를 떠나 유랑생활을 했다. 작전의 이름이 ‘괴룡 1호’인지는 나중에 알았다. 소대장은 작전 개요와 진행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상급 부대에서 하달된 지침에 따를 뿐이었다. 지도를 보며 정해진 좌표 지점으로 정찰을 나갔고, 경계를 나갔고, 저격이 날아오면 응사를 하거나 상부에 무전보고를 한 뒤 수색을 했다. 밤에는 소대별로 돌아가며 매복을 나갔다. 중대 기지로 돌아가지 못할 땐 취침 시간이 따로 없었다. 텐트를 치지도 않았다. 판초 우의를 덮어쓴 채 밀림이나 개활지에서 쪽잠을 잤다. 식사 시간도 따로 없었다. 배고프면 각자 틈나는 대로 조리가 필요 없는 시레이션(C-Ration·전투식량)을 까먹었다. 미군 헬리콥터는 실탄과 식량과 물을 부지런히 공수했다. 2월12일 퐁니·퐁넛촌을 지나치다 저격을 받고 나서 마을로 진입한 것은 괴룡 1호 작전 유랑의 한가운데에서였다. 그날 분명히 중대의 어느 소대, 어느 분대에서 찜찜한 사건이 벌어졌다. 다음날 중대원들은 어제 일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피로에 절었다. 전우들이 눈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졌다. 다치지 말아야 했다. 죽지 말아야 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헛것을 보고 자해하는 병사들최영언 중위가 지휘하는 1소대는 40여 명이었다. 분대별로 13명. 여기에 화기소대원들이 1·2·3소대 안으로 나누어 섞여 각 소대의 화기분대를 구성했다. 이에 따라 실제 1소대 병력은 50여 명이었다(중대 병력은 150여 명). 화기분대원들은 캘리버30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중대장 휘하엔 60mm 박격포가 따라다녔다. 해병들은 1개 분대에 하나씩 M79 유탄발사기가, 3명에 하나씩 로켓포가 지급됐다. M16 소총은 각자 기본이었다. 실탄과 수류탄과 연막탄과 조명탄과 방독면과 대검과 수통과 판초 우의와 시레이션도 휴대해야 했다. 크레모아와 탄약 박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어깨에 메거나, 가슴과 허리에 차거나, 손으로 들어야 했다. 아니면 배낭에 쑤셔넣었다. 악과 깡뿐 아니라 화력에서도 육군 보병을 능가한다는 것은 해병들의 자부심이었다. 그 무기들이 일개 분대에서만 불을 뿜어도 수백 명을 얼마든지 몰살시킬 수 있었다.
숲과 늪에 숨은 베트콩들은 끊임없이 이들의 신변을 노렸다. 소대장은 통신병과 함께 행동했다. 안테나가 꽂힌 무전기를 멘 통신병은 가장 쉽게 눈에 띄는 적의 먹잇감이었다. 그 옆의 소대장도 위험했다. 해병들은 시레이션 박스의 얇고 긴 철판을 떼어내 배낭 위에 안테나처럼 꽂고 행군했다. 베트콩이 볼 땐 전부 다 통신병처럼 보였다. 위장전술이었다. 낮에 참호를 파는 것도 위험했다. 때로는 밤에 그곳을 향해 적의 박격포나 로켓포가 내리꽂혔다. 해병들은 쉴 새 없이 이곳저곳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조명탄이 터지고 총구가 불을 뿜었다호이안과 꽝남 일대에서 한국군은 사실상 미군의 협조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가기 힘들었다. 첫째, 수륙양용 장갑차(LVT)의 지원이었다. 이 지역은 투본강을 비롯한 많은 강이 서쪽 내륙에서 동쪽 해안으로 흘렀다. 베트콩들은 강변과 늪을 이용해 은신처를 만들어가며 공격했다. 아군의 기동과 수색작전에는 적지 않은 장애 요소였다. 매일 작전 때마다 중대별로 서너 대의 LVT가 앞장을 섰다. 강과 늪 지역에서 병력 수송을 책임지며 작전의 효율성을 높여준 것이다. LVT는 곳곳에 매설된 부비트랩을 차단하는 기능도 했다. 둘째는 헬리콥터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정글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할 때 헬리콥터만큼 기동력 있는 수단이 없었다. 미군 헬리콥터는 해병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빅브러더’이기도 했다. 밤에 중대장의 판단에 따라 좀더 안전한 곳으로 좌표를 조금만 벗어나도 대대로부터 무전 연락이 왔다. 하늘에서 헬리콥터로 항공사진을 찍은 미군 쪽이 한국군의 위치 이동에 관해 따졌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작전을 하는 한국군 해병들에게 LVT와 헬리콥터의 굉음은 일종의 배경음악이었다.
최영언 중위에게도 짜릿한 순간이 있었다. 4월13일 ‘서룡 1호 작전’ 때였다. ‘괴룡 2호 작전’ 다음으로 ‘베트콩 잔당 박멸’을 기치로 내건 작전이었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 호이안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1번 국도 근처였다. 소대별로 돌아가며 적이 침투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야간 매복을 나갔다. 그날은 1소대 차례. 저녁 8시30분께였다. 최 중위는 전방 200m 앞에서 1개 분대로 추산되는 적의 접근을 발견했다. 총을 들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과잉된 포즈로 살금살금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중대본부에 무전을 쳤다. 적이 더 접근하기를 기다리라는 답변이 왔다. 마침내 50m 앞이었다. 그들이 마지막 논둑 하나를 넘으려는 순간이었다. 대대본부에서 쏜 조명탄이 터졌다. 불꽃이 일며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전방은 확 트인 개활지였다. 크레모아 스위치를 누른 뒤 M16 소총과 캘리버30 기관총으로 일제사격을 했다. 수류탄이 작렬했다. 적을 11명이나 사살했다. 에 따르면 이날 1중대는 AK 자동소총 2정과 82mm 포탄 3발, 수류탄 7발 등 기타 장비를 노획했다. 최영언 중위는 소대원들과 함께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대통령이 격려한다고 불안이 가시지는 않았다.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병사가 하나둘 생겨났다. 중대본부에서 밤에 경계를 서다 헛소리를 하는 병사도 있었다. “저기 앞에 누군가 새까맣게 오고 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달이 밝던 밤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흔들렸다. 나뭇잎뿐이었다. 일부 병사들은 자해행위를 했다. 자기 발을 향해 M16 소총을 쏘았다. 후송을 보냈다.
정찰·매복으로부터 해방되다최영언 중위는 5월부터 전투의 부담에서 벗어났다. 1소대장에서 부중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부중대장은 중대 진지의 경계와 보급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정글로 정찰이나 매복을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다낭에 있는 미군 휴양지에서 해수욕을 할 기회도 얻었다. 처음으로 고향의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베트남에 올 땐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장남으로서, 공연히 부모님의 근심을 살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동료들과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어 동봉했다. “저는 월남에서 아주 편하게 잘 있습니다. 부모님, 아무런 걱정 하지 마십시오.”
여유가 생기고 나선 가끔 주말에 외출증을 끊어 다낭 또는 호이안 시내로 나갔다. 옛 유적이 즐비한 복고풍 도심의 카페에서 커피나 맥주를 마셨다. 주머니엔 초콜릿과 사탕이 가득했다. 시레이션 상자에서 꺼내온 것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 부산에서 미군들에게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 시절의 미군들처럼 베트남 아이들에게 초콜릿과 사탕을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손을 벌리며 좋아라 했다. 근원을 따지자면, 자신이 나눠주는 그 초콜릿 역시 미국에서 받은 것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친절한 한국군 해병 장교였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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