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텃밭 배추를 뽑아 반으로 갈라보니, 속이 차긴 했는데 아직은 너무 잘다.
이맘때 비 오면 기온은 내리막 계단처럼 뚝뚝 떨어진다. 주말 농사꾼에겐 존재론적 고민의 시기다. “뽑느냐 기다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스치듯 지나가는 가을을 붙잡고 싶어, 2025년 11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텃밭 동무들이 오랜만에 뭉쳤다. 한여름 비바람에 꺾인 나뭇가지를 주워다 올가을 첫 불을 피웠다. 잘 마른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끝물 산모기가 연기를 피해 달아난다. 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무심히 손뼉을 쳐도 잡힐 정도다.
불 피우는 사이, 콩과 팥 수확이 시작됐다. 밭장이 뿌리째 쑥쑥 뽑아놓으면 둘이 짝을 이뤄 꼬투리를 따내 모았다. 따낸 콩과 팥 꼬투리를 평상 가운데 두고, 동무들이 둥그렇게 앉았다. 서리태는 덜 여물었는지 굵은 알이 부들부들하다. 빛깔도 검다기보다 보랏빛에 가깝다. 밥 지을 때 한 움큼 넣으면 달겠다 싶다. 팥은 밭장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해에 수확해 나눠주신 걸 벌써 여러 해째 키우고 있다. 올해도 내년에 종자를 하고 남을 정도는 거뒀다. 수확 직후 팥알은 연지인 양 짙은 주황색인데 햇볕에 말리면 검붉게 팥죽색으로 바뀐다.
비 예보가 있었는데 다행히 우중충할 뿐 빗발은 날리지 않았다. 일주일 전 퇴비를 넣은 빈 밭에 겨우내 텃밭을 지킬 마늘과 양파를 넣을 차례다. 마늘은 충북 괴산에서 난 육쪽마늘 한 망을 사왔다. 양파는 모종으로 내는데, 능곡시장 근처 단골 모종가게에서 200개 한 판을 데려왔다. 호미 반 정도 간격으로 한 줄에 네 개씩 양파 모종을 심었다. 쭈그려 앉아 호미 손잡이로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모종을 넣었다. 반고랑이나 심었을까,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양파는 두 고랑 반, 마늘은 한 고랑 반 정도 냈다. 한겨울 추위를 잘 버텨 내년 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할 일 다 했으니 먹고 놀 시간이다. 무 하나 뽑아 씻어 썩썩 썰었다. 배보다 달다. 큰형은 몇 주 전부터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모셔온 전통주 아락으로 만든 하이볼을 맛보게 해주겠다고 예고했다. 메고 온 보랭가방 안에 얼음, 칼라만시즙, 탄산수 등이 가득했다. 쌀이나 야자 수액으로 빚는 증류주인 아락은 네팔 전통주 락시와 닮았다. 한 모금 삼키니 입안에 옅은 꽃향이 맴돈다. ‘프로 불판러'인 밭장이 집게와 가위를 들고 불 앞에 섰다. 동무들은 저마다 가져온 반찬을 상에 올린다. 막내가 덜 익은 토마토로 담근 피클이 단연 발군이다. ‘주막농장'의 대단원은 역시 라면이다. 굽다 남은 버섯을 듬뿍 넣은 라면 국물을 들이켜니 약간의 한기마저 가셨다.
가을 농사의 마지막 성패는 수확 시기가 가른다. 두 달 남짓 키운 배추와 무가 갑작스러운 추위로 얼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기상청 중기예보를 보니, 주중에 비 온 뒤 하루이틀씩 영하로 떨어지기를 반복한단다. 11월 셋째 주 일요일 오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혼자 밭에 가봤다. 올해 처음 모종을 낸 무는 바로 수확해도 될 정도로 자랐다. 배추 한 통을 뽑아 반을 갈랐다. 속이 차긴 했는데, 너무 잘다. 몇 주만 더 자라면 너끈히 김장할 수 있겠다 싶다. 배추를 묶어줄까? 비닐을 씌워줄까? 아니 아니, 욕심 버리고 지금 뽑아야 하나? 바람이 훅 분다. 찬기가 밭 전체로 번진다. 속절없이 심사만 복잡해졌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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