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SBS)를 보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은 사람이다. 의료계의 ‘미생’인 인턴 박태경(김우석)을 비롯해 마취과 의사 조원진(이진희), 의사 김성진(허준석)이 홀로 싸우는 수정을 돕는다. 선후배와 사제 관계로 자신들만의 사조직을 만든 남성 의사들의 ‘의국’ 바깥에 있는 이들이 연대한 것이다. SBS 제공
“미친개, 아니 걔, 그니까 계수정 선생, 도대체 뭐예요?”
병원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구서대학교 서남병원의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의사용역소개소에서 파견 나온 ‘용병 의사’ 계수정(김지원). 소개소장 장희숙(이정은)이 내민 근무조건부터 당황스럽다. 교수의 연구 돕기, 논문 자료 조사, 원장 회진과 교수 회진, 회식과 친목 모임, 장기자랑까지 “모두 절대 하지 않습니다”. 대신 “실패도 하지 않습니다”.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SBS)는 2012년부터 시즌7까지 이어진 일본 드라마 ‘닥터X: 외과의 다이몬 미치코’가 원작이다. 프리랜서 외과의사라는 설정과 초반 에피소드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지만, 수정의 과거사와 한국 의료계의 현실 등을 추가해 각색했다.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SBS)는 2012년부터 시즌7까지 이어진 일본 드라마 ‘닥터X: 외과의 다이몬 미치코’가 원작이다. 프리랜서 외과의사라는 설정과 초반 에피소드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지만, 수정의 과거사와 한국 의료계의 현실 등을 추가해 각색했다. SBS 제공
드라마는 1회부터 현실의 상황을 보여준다. 의사들로 구성된 ‘목련회’ 모임에서 회장은 코로나19와 수술실 폐회로티브이(CCTV) 설치 법제화, 의대 증원 반대 파업까지 “이 지난한 시간을 필사의 힘으로 잘 버텨왔다”며 “의사를 지켜줘야 의료가 바로 선다는 걸 저 어리석은 것들은 모른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다 같이 건배사를 외친다. “하얀 가운을 위하여!”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같은 시간을 다르게 말한다. 그 시간은 “정부는 대책 없는 보여주기식 법안을 던졌고 의사는 병원을 떠나는 것으로” 응한 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덧붙인다. “이들 싸움에 환자는 없다.” 목련회 회장의 말 어디에도 ‘환자’는 호명되지 않았으니, 내레이션은 목련회의 자평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수정은 이 두 개의 다른 진술을 가로지르며 등장한다. “무리에 속하지 않는 의사. 의국에 속하지 않는 프리랜서. 일명 용병 의사. 생명을 다루는 의료 행위조차 돈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굴러가는 이 하얀 마피아의 시대에 나타난 고독한 존재. 권위를 경멸하고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는다. 오로지 의사면허와 바닥부터 갈고닦은 술기만이 무기다.”
이 드라마를 보게 하는 힘은 두 가지다. 하나는 풍자다. 병원이 배경이고 의사가 주인공이지만 ‘닥터X’는 의학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위험한 면이 있다. 우선 인물과 상황 설정이 다소 과장됐다. 또한 ‘의사 집단’을 무능하고 위선적으로 그려놓았다. 누군가는 불편할 수도 있는 이런 설정의 방향은 선명하다. 위선적이고 부당한 권위를 비웃는 것.
1회에서 병원장의 ‘노욕’에 밀려 집도를 맡겨둔 의사들을 향해 수정은 일갈한다. “돈 잘 벌고 출세하려고 공부만 한 인간들. 윤리고 신념이고 생각 없이 그저 멍청하게 똑똑한 인간들. 교수들 앞에선 엎드리고 환자들 앞에선 고개 쳐들고, 교수 앞에선 아첨하고, 간호사 앞에선 지랄하고, 위 구린 건 못 본 척하고 자기 구린 건 시스템 탓”이나 하는 “그냥 의사이기만 한 인간들”. 결국 병원장이 수술 중 쓰러지자 의사들은 개복한 환자를 수술대에 그대로 둔 채 병원장에게 달려가고, 수정은 그 빈자리를 채워 수술을 끝낸다.
드라마는 이 밖에도 의사의 권위를 과시하는 회진, 제약회사의 접대를 받거나 제약회사가 지원한 연구의 논문 번역을 떠맡기는 일처럼 “오랜 관례”로 유지돼온 일들을 비웃듯 보여준다. 의사만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2회에서 수정은 병원 로비에서 노조 조끼를 든 보호자를 보고 “저거 치우라”고 소리 지르는 재벌 회장을 바깥으로 치워버린다.
그렇게 드라마는 “체면, 위신, 권위, 요런 비슷비슷한 것들로 지탱”되는 병원과 의사들의 세계를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우스꽝스러워 보일수록, 수정이 그들에게 일침을 던질수록 시청자는 통쾌하다. 코로나19와 의료 파업으로 인한 의료 공백의 시간을 지나며 쌓인 사회의 감정을 드라마가 웃음으로 대신 풀어주는 것이다. 의학 드라마에서 늘 존경과 고뇌의 대상이던 의사들이 이렇게 대놓고 조롱당한 적은 드물었다. 웃음은 권위에 대항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하얀 가운”을 입고 하는 행동이 농담처럼 여겨지는 순간, 그들을 “하얀 마피아”로 명명하는 순간, 그 권위가 무엇으로 지탱됐는지가 드러난다.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SBS)는 2012년부터 시즌7까지 이어진 일본 드라마 ‘닥터X: 외과의 다이몬 미치코’가 원작이다. 프리랜서 외과의사라는 설정과 초반 에피소드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지만, 수정의 과거사와 한국 의료계의 현실 등을 추가해 각색했다. SBS 제공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의사를 마냥 권위적이며 이기적인 집단으로만 그리는 건 아니다. 3회에서 병원에서 일하던 청소노동자가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진다. 개두술을 해야 할 상황이지만 수술이 가능한 의사들은 자리에 없고, 의사들은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방법부터 고민한다. 1년 전 이 병원의 응급구조사가 같은 증상으로 쓰러졌을 때 수술할 의사가 없어 끝내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도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의사들에게도 사정이 있다. 개두술 같은 크고 위험한 수술은 의료 수가가 낮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져야 한다. 드라마는 의사들의 이런 항변을 생략하지 않는다. “의사도 사람이야.” 물론 이 항변은 수정에게 곧바로 반박당한다. “그쪽만 사람이야? 환자도 사람이야.” 생명에 대한 책임보다는 변명과 권위만 앞세우는 의사들에게 수정은 이렇게 묻는다. “의사이려고 노력은 안 하십니까? 그냥 사람이기만 하십니까? 그럼 언제 의사 하십니까?”
의사의 길과 사람의 길이 과연 다른 것일까? “의사도 사람이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낮은 의료 수가, 부족한 인력, 문제가 생기면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시스템. 의사들의 항변에는 한국 의료계의 구조적 문제가 담겨 있다. 실제로 그 무게를 가장 크게 짊어지는 건, 끝까지 수술실을 지키다 지쳐가는 의사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수술할 의사가 없어 가족과 동료를 잃은 이들이나, 병원 ‘뺑뺑이’를 돌다 지친 환자가 있는 상황에서 나온다면, 구조를 문제 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이유로 바뀐다. 1회에서 목련회가 “의사를 지켜줘야” 한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사들은 자신도 ‘사람’이라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자리에 ‘환자’라는 ‘사람’은 없는 게 문제다. “의사도 사람이다”라는 말의 역설이다.
수정은 그 역설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는 “하지 않습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의사다. 그런데 수정이 하지 않겠다는 건 회진, 회식, 논문 자료 조사처럼 의사면허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의사들이 피하는 건 면허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 즉 수술이다. 수정의 투쟁은 “하얀 가운”을 입고 권위를 부리면서도 정작 의사가 되려 하지 않는 의사들, 환자를 위하지 않는 병원 조직을 향한 것이다.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SBS)는 2012년부터 시즌7까지 이어진 일본 드라마 ‘닥터X: 외과의 다이몬 미치코’가 원작이다. 프리랜서 외과의사라는 설정과 초반 에피소드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지만, 수정의 과거사와 한국 의료계의 현실 등을 추가해 각색했다. SBS 제공
이 드라마를 보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은 사람이다. 드라마는 수정을 홀로 싸우게 두지 않는다. 천재적인 술기를 가진 의사도 수술은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의료계의 ‘미생’인 인턴 박태경(김우석)이 늘 수정 곁을 맴돈다. 마취과 의사 조원진(이진희)은 수정과 함께 수술실을 지킨다. 병원 의사 무리 중 유일한 여성으로 등장하는 원진은 병원에 소속됐지만, 목련회로 대표되는 남성 의사들의 조직 문화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또한 수정이 배치된 응급의학과는 중요도에 비해 의사들이 기피하고 지원에서도 소외된 과로 그려진다. 그곳을 지키는 “착한 의사” 김성진(허준석)도 수정을 돕는다. 선후배와 사제 관계로 촘촘히 엮여 자신들만의 사조직을 만든 남성 의사들의 ‘의국’ 바깥에, 그 조직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연대한 셈이다.
그리고 이들이 살리는 사람들은 수술 장갑을 납품한 업체 사장, 장애인 엄마를 둔 소아당뇨 청소년, 병원 곳곳을 누비는 청소노동자 등이다. 병원이 의사들의 체면과 브이아이피(VIP) 환자를 우선해 움직일 때 수정은 그 반대편에 서서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먼저 본다. 수정이 청소노동자를 살린 뒤에야 병원장 부승권(손현주)은 1년 전 병원에서 일하다 쓰러진 직원을 살리지 못한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수정을 경계하던 의사들도 수정에게 자극받아 차츰 각성해간다. 즉 수정은 “의사이기만 한” 집단을 “사람”의 세계로 변화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리한 각색으로 뚜렷한 매력을 가진 드라마지만, 아쉬움도 크다. ‘닥터X’가 그간 우리가 보아온 의학 드라마들과 다른 결의 시도인 건 맞다. 하지만 풍자의 날은 충분히 서 있지 않다. 풍자는 웃음을 통해 대상이 놓인 구조까지 비출 때 힘을 얻는다. 그러나 드라마는 비웃던 대상을 결국 끌어안는다. 앞서 말한 의사들의 각성과 병원장의 사과가 그렇다. 원작의 만화 같은 과장 대신, 한국 시청자에게 익숙한 ‘환자도 살리고 의사도 성장하는 이야기’를 택한 셈이다. 현실에 발 디딘 각색이지만, 그만큼 원작이 지녔던 서늘한 거리감은 옅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구성된 이유는 장르 때문이다. 제작진은 일찌감치 수정을 ‘메디컬 다크히어로’로 소개했다. 실제로 한국판 ‘닥터X’는 풍자극보다는 다크히어로물에 가깝다. 탐욕스러운 권력자와 무능한 조직 앞에 ‘먼치킨’ 영웅이 나타나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며 ‘사이다’ 맛 정의를 구현하고, 그 곁의 사람들은 감화되어 변한다. 그간 한국 드라마가 반복해온 익숙한 흥행 불패 공식이다. 영웅이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곁의 사람들이 감화되어 변한다. 풍자가 웃음 끝에 질문을 남긴다면, ‘피치 못할 사연이 있고 알고 보면 착한 천재 의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이 드라마는 감동과 사이다로 답을 대신 내려준다. 시원하고 따뜻하지만, 그만큼 질문은 쉽게 사라진다.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SBS)를 보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은 사람이다. 의료계의 ‘미생’인 인턴 박태경(김우석)을 비롯해 마취과 의사 조원진(이진희), 의사 김성진(허준석)이 홀로 싸우는 수정을 돕는다. 선후배와 사제 관계로 자신들만의 사조직을 만든 남성 의사들의 ‘의국’ 바깥에 있는 이들이 연대한 것이다. SBS 제공
물론 아직 많은 회차가 남아 있다. 의료 수가와 인력에 대한 의사들의 항변, 제약회사와 얽힌 오랜 관례처럼 드라마는 이미 개인 너머의 구조를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건 제목이다. 원작의 부제는 주인공의 이름을 내걸었다면, 한국판은 ‘하얀 마피아의 시대’를 호명한다. 한 의사가 권력의 탑을 오르다 무너지던 ‘하얀거탑’의 시대를 지나, 이제 병원은 ‘하얀 마피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뜻일까? ‘닥터X’가 천재 의사와 무능하고 위선적인 의사 집단을 대비시켜 의사를 악마화하는 드라마로 남을지, 의사도 환자도 지치게 하는 이 시대를 뾰족하게 풍자하는 드라마가 될지는 남은 회차만이 알고 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김민석, 신천지 의혹 키우자니 ‘수사 부담’…덮자니 ‘공개 압박’

윤석열·김건희 이어 오세훈 2심서도 명태균 진술 배척…대법 판단 촉각

이 대통령 ‘주52시간 특례’ 발언에…“죽도록 일해 돈 벌라는 정책”

법무장관 후보 박균택·양부남…‘대통령 변호’ ‘공소 취소’ 논란

조국 “오세훈 판결은 사법정치의 반격…무기력한 민주당, 위기 만들어”

한동훈, 딸 ‘허위 스펙’ 수사 무마 의혹에 “재탕 3탕 4탕…이게 정치보복”

잠수교, 내일부터 차량 통행 중단…개통 50년 만에 ‘보행전용교’로

청와대, 내년 가상자산 과세 ‘유예’ 가닥

오세훈 2심 무죄에 정치 격랑…장동혁·한동훈은 뜨뜻미지근

추미애 “내가 정치적 화형 당하더라도…소방 재정 문제 해결”















![[단독] 학부모에게 월 수백만원씩 ‘제2월급’ 받은 여자축구 감독 [단독] 학부모에게 월 수백만원씩 ‘제2월급’ 받은 여자축구 감독](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1023/53_17927283699523_20261022503801.jpg)



![[단독] 대학 운동부는 ‘감독님 찬조금’ 감시 사각지대 [단독] 대학 운동부는 ‘감독님 찬조금’ 감시 사각지대](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1023/53_17927282456637_2026102250380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