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한편에 아이가 어릴 때 쓰던 조립식 침대가 있다. 간이 소파 겸 ‘졸음쉼터’로 사용하는데, 얼마 전 밥 먹고 잠깐 눈 붙이려고 누웠을 때다. 비몽사몽 중에도 뭔가 자꾸 날아다닌다는 느낌이 확 왔다. 고개 들어 바깥 베란다를 살펴보니, 헉, 말벌이다. 예닐곱 마리가 마치 보초라도 서듯 주변에 앉아 있었고, 짓고 있는 집은 벌써 초등학생 주먹만큼 커져 있다. 한 마리가 열심히 엉덩이를 움직이며 집을 짓는데, 연신 두세 마리가 날아와 ‘자재’라도 조달하는 눈치다.
큰일이다 싶어 바로 119에 전화했다. 10분도 안 돼 대원 세 분이 집에 도착했다. 현장을 살피더니 역할을 나누고 바로 말벌집 제거 작전에 들어갔다. 강력 살충제를 동원해 상황을 간단하게 장악했다. 떼어낸 말벌집을 따로 수거까지 해 철수하셨다. “집을 다시 짓진 않을 거고, 확인하러 다시 오는 놈들이 있을 겁니다. 하루 이틀 베란다에 나가지 마세요.” 주의 사항 전달까지 1분이나 걸렸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진국’이었던 한국의 응급구조대는 여전히 빠르고, 정확하고, 유능했다.
8~9월은 말벌의 산란기다. 둥지도 확장하고 꿀벌을 공격해 영양분도 보충한다. 폭염이 길어질수록 벌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벌 쏘임 사고도 늘어난단다. 겨울철 이상고온 현상도 말벌 개체수가 많아지는 데 한몫한다니, 기후위기가 일상의 문제란 점을 새삼 실감했다.
10여 년 전 텃밭 농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김장 배추는 9월 초·중순에 냈다. 더위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풀을 정리했고, 퇴비를 넣고 밭을 만들고 한 주를 놀려 모종을 심었다. 수확은 대체로 11월 말에서 늦게는 12월 초에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심는 시기는 같은데 캐는 시기를 앞당겨야 했다. 추위가 빨리 와서다. 생육기간이 짧아지니, 당연히 배추도 덜 컸다. 심는 시기를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2023년엔 8월27일 배추 모종을 내고, 수확은 11월25일에 했다. 배추와 무가 조금 얼긴 했지만, 절임배추를 구해 그럭저럭 김장을 마쳤다. 2024년엔 애초 열흘 정도 모종을 빨리 낼 요량이었다. 더워도 너무 더워 엄두를 못 냈다. 8월17일 오후 5시30분께 풀 정리를 위해 예초기에 시동을 걸자마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농사 그만해야겠다”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렸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달아나던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배추 모종 낼 정도만 풀을 쳐내고, 잦아드는 빗줄기와 함께 작업을 마무리했다.
8월24일 오후 화훼단지에 가서 배추 모종(불암3호)과 가을 상추 모종을 샀다. 풀은 그새 또 자라 있었다. 5명이 달려들어 퇴비를 넣고 밭을 갈았다. 밭장의 ‘작업중지명령’에 따라 타프 친 평상에 모여 앉아 선풍기를 틀었다.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텃밭 동무는 찬 물통을 베개 삼아 눕혔다. 숨을 고르고 목도 축인 뒤 하나둘 다시 나섰다. 밭 다 만들어 모종까지 넣고 나니 사위가 어둑해졌다. 땀과 더위가 주춤해지니 시커먼 산모기가 기피제 뿌린 온몸에 파상공세를 퍼붓는다.
어찌어찌 올해도 김장 농사 준비는 얼추 마쳤다. 남은 밭엔 무와 돌산갓 따위 씨나 슬슬 뿌려주면 된다. 커가는 배추 옆에서 막걸리 잔 기울일 일만 남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텃밭 동무들과 흐뭇해할 즈음 갑자기 떠올랐다. 근데, 내년엔 어쩌지? 오지 않은 더위가 벌써 무섭다.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텃밭 동무 장철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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