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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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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저 새싹, 뽑느냐 살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인천 계양 편
무경운 덕에 뜻밖에 싹 내미는 지난 작물들… 반가움 한편으로 솎아내기 선택의 고민
등록 2026-05-21 22:27 수정 2026-05-23 08:54
우유부단한 농사꾼의 텃밭. 틀밭 밖의 ‘수레국화’를 벨까 말까 아직도 고민 중이다.

우유부단한 농사꾼의 텃밭. 틀밭 밖의 ‘수레국화’를 벨까 말까 아직도 고민 중이다.


5월의 농부시장 ‘마르셰’에는 모두가 유럽상추를 들고나왔다. ‘버터헤드’ 외의 다양한 유럽 잎채소를 먹게 된 게 고작 5년 정도인 것 같은데, 이제는 모든 매대에 유럽상추가 올라와 서로 박터지게 경쟁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사하는 농민마다 유럽상추를 그냥 주려고 한다. 급기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한 농민이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말한다. “어디까지 갔어? 가까이에 있으면 상추 좀 가져가!”

마르셰에서는 흔하디흔한 것이 유럽상추지만 동네 마트나 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청치마, 적상추, 꽃상추 같은 고기쌈으로 익숙한 전통적인(?) 상추만 잔뜩 심겨 있다. 동네에서 유럽상추를 얻어먹기는 어려울 듯해 우리 밭에도 이미 유럽상추와 치커리가 잔뜩 크고 있는데, 농민이 한 아름 싸준 걸 안고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농사짓기 전에는 뭔가를 잘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 누가 텃밭 채소를 나눠준다고 하면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이제는 덥석덥석 잘도 받는다. 농사란 필요하다 싶으면 모자라고, 충분하다 싶으면 넘쳐나는 얄궂음이 있으니까. 때로는 잘 받고 즐거워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것도 동료 농사꾼을 위해 필요한 미덕임을 잘 안다.

이제는 나도 베풀 차례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린다. “이번 주말에 뭐 해? 밭에 와서 상추 좀 따갈래?” 마치 ‘폭탄 돌리기’처럼 ‘상추 돌리기’가 시작됐다. 다행히 유럽상추는 보통 먹어왔던 상추와 달리 양배추처럼 속이 차서 공처럼 부풀어지는 ‘결구형’이 많다. 넘친다 싶으면 포기째 수확해버리면 그만이다. 농민들을 흉내 내며 친구들에게 인심 좋게 유럽상추를 베어주고 아직 다 심지 못한 토마토와 바질에 자리를 내어준다.

어라, 그런데… 익숙한 새싹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고수, 이건 보리지, 이건 설마 동부? 땅을 갈아엎지 않는 농사를 지으니 매년 뜻밖의 횡재를 하는 일이 익숙하다. 하지만 올해처럼 모종을 많이 얻은 농사철에 좋아하는 작물이 ‘뿅’ 하고 올라오니 틀밭 안을 정리할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빠진다.

고수는 이미 꽃대가 올라왔으니 새로 발아한 씨앗이 너무 반갑고, 보리지도 이미 많이 심었지만 큰 덩치와 자글자글한 보랏빛 꽃을 꺾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크다. 게다가 혹시나 이제는 씨앗을 다 소진한 ‘흰꽃보리지’의 싹일지도 모르니 이건 꼭 지켜봐야 한다! 동부는 지난해 묵은 씨앗을 던진 것 중 하나가 살아남아 한 포기에서 정말 많은 콩을 내주었다. 이런 동부가 올해도 저절로 자라다니! 나는 정말 운 좋은 농사꾼이 틀림없다.

이래서 농민들이 땅을 갈아엎는 선택을 하는 걸까? 식물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두기는 필요해서 뭐 하나가 아깝기 시작해 전부 기르면 다 같이 웃자라 결국 다 같이 수확량이 떨어지게 된다. 땅을 갈지 않는 농사는 이런 기쁨과 동시에 매 순간 솎아내고 포기해야 하는 고민거리를 마구 안겨준다.

무엇을 뽑아내고 무엇을 살려내야 할지 고뇌하던 그 순간, 상추의 답례로 풀을 정리해준다는 친구가 고수를 모두 뽑아버렸다. 심지어 제자리에서 잘 자라는 완두도 같이 뽑아버렸지만 왠지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래, 그 자리에 레몬그라스를 심으면 되겠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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