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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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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에서 빗소리가 났다

꽃은 지고 연초록은 깊어지는 계절, 텃밭 동무들과 미나리전을 부쳐 먹었다
등록 2026-05-08 12:09 수정 2026-05-12 15:44

―경기 고양 편

잠깐 뜯은 미나리가 한 움큼이다. 연초록이 꽃보다 예쁘다.

잠깐 뜯은 미나리가 한 움큼이다. 연초록이 꽃보다 예쁘다.


연분홍은 봄바람에 갔다. 청노새 딸랑대는 역마차 길에 가로수가 두 줄인데, 뒷줄 벚꽃 지니 앞줄 이팝나무가 허연 꽃을 피우더라. 꽃 지든 별 지든 울 일 없다. 연분홍 떠난 자리를 연초록이 채웠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계절이다.

열매채소 모종 낸 다음 주말, 밭은 깡깡 말라 있었다. 동무들 일정이 제각각이라 ‘텃밭 급식’을 한 주 쉬기로 한 터다. 월동시금치와 키 자란 열무 걱정에 잠깐 들른 밭은 더없이 싱그러웠다. 연초록이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물 듬뿍 주며 살펴보니 모종 상태가 제각각이다. 호박은 제법 자리를 잡았는데, 오이는 말라 납작 엎드려 있다. 말라붙은 모종 두 주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 방울토마토도 오이랑 엇비슷한데, 덩치가 조금 큰 대추방울이는 또 멀쩡하다. 모종 심자마자 지주대까지 세워줬는데도 가지는 비실비실하다. 다행히 고추는 아삭이, 청양이 모두 무탈했다.

열매채소 모종 사면서 큰맘 먹고 깻잎 모종도 데려왔다. 한 밭 널찍하게 심었는데, 아직 땅에 딱 붙어 웅크리고만 있다. 누가 뿌린 것도 아닌데, 밭이랑 여기저기에 어린 깻잎이 잔뜩 올라와 있다. 모종 괜히 샀나 싶다. 월동양파는 줄기를 무성하게 키웠는데, 몇 개 뽑아보니 머리 큰 중파 수준이다. 마늘은 이놈 저놈 꽃대(마늘종) 올릴 준비가 한창이다.

왕창 씨 뿌린 잎채소는 제법 판매용 모종만큼 자랐다. 워낙 밀식이라 두어 주 뒤 솎아내야 할 것 같다. 모종으로 낸 잎채소는 수확을 시작해도 될 만큼 의젓해졌다. 오후엔 볕이 들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아줬으니 더위가 와도 웃자라진 않을 거다. 고수와 아욱 밭은 아직 풋풋한데, 공심채는 제대로 모양 갖춰 싹을 올렸다. 지난해 ‘텃밭 제왕’ 작두콩을 이겼던 만차랑단호박은 ‘텃밭 폭군’ 칡과 맞붙이기 위해 언덕 밭에 씨를 잔뜩 넣었다. 아직 떡잎이 보이지 않아 물만 여러 번 줬다.

월동시금치는 슬슬 꽃대를 올리기 시작한다. 시금치 여린 꽃대는 은은한 단맛이 나서 샐러드로 제격이다. 한 밭에 반씩 나눠 심은 열무와 루콜라는 초록이 갈수록 짙어진다. 한 움큼씩 뽑듯이 솎아냈는데도 표나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빼곡하다. 물 주다보니 햇볕이 따가웠다. 그늘에 들어와 앉으니 살랑살랑 바람이 상쾌하다. 산모기가 기승부리기 전까지 최대한 계절을 즐겨야 한다. 텃밭 동무들에게 단체문자부터 보냈다.

약한 빗발이 날리는 한 주 뒤 주말, 동무 넷이 밭에 모였다. 메뉴는 열무 양푼비빔밥과 돼지 앞다리 수육으로 정했다. 양푼에 열무와 여린 쑥갓, 각종 잎채소를 툭툭 끊어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곁들여 비볐다. 녹차잎과 쌍화탕 한 병을 넣고 수육을 삶으려는데, 옛 밭장이 어느새 따온 더덕잎 한 움큼을 냄비에 넣는다. 수육 익기를 기다리며 막걸리 병을 땄다.

비 오는 날엔 우리 음식 부침개가 최고다. 아랫밭에 묵혀둔 미나리가 떠올랐다. 장화 신고 내려가 쭈그려 앉으니 애기똥풀 군락 사이로 군데군데 미나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금방 끊은 게 한 움큼이다. 여리여리한 연초록이 꽃보다 예쁘다. 실파와 달래까지 곁들여 반죽을 했다. 부침개 전용으로 새로 장만한 프라이팬에 식용유와 참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반죽을 올렸다. 비는 그쳤는데, 팬에서 빗소리가 난다. 수육도 다 익었다. 때가 왔다. 팬을 휙 돌려 부침개 공중 뒤집기에 성공하자, 동무들이 ‘와'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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