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농부의 한 해는 김장으로 마무리된다. 더위가 채 가시기 전 모종을 내어 애지중지 키운 배추와 무를 수확해, 절이고 버무려 김치통을 채우고 나면 그해 농사가 끝난다. 흰 눈 소복이 쌓인 겨울 텃밭은 미리 넣어둔 양파와 마늘 모종이 지킨다.
2023년 11월7일 날씨가 수상해 주간 일기예보를 봤다. 주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단다. 배추와 무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단체대화방에 소식을 올리자 의견이 분분하다. 당장 뽑자는 쪽과 비닐 덮어 두어 주 더 키우자는 쪽으로 갈렸는데, 어쨌든 토요일 아침에 모이기로 했다.
11월11일 아침, 올겨울 들어 처음 얼음이 얼었다. 먼저 밭에 도착한 동무들이 “손가락이 따가울 정도”란다. 김장 준비가 전혀 안 됐으니, 아무래도 비닐을 덮어주는 게 낫겠다 싶다. 자주 가는 건재상에 들러 1m에 2천원 하는 두겹 비닐을 10m 사서 서둘러 밭으로 향했다.
추위 탓인가? 배추가 잔뜩 웅크린 모양새다. 겉잎을 만져보니 차디차다. 양손으로 눌러보니 속이 제법 들긴 했는데, 역시 두어 주 더 키우는 게 좋겠다. 비닐을 펼쳤는데, 아뿔싸! 길이가 살짝 짧다. 고랑마다 양쪽 끝자락에 심은 배추를 두어 포기씩 솎아냈다. 얼추 길이가 맞는다. 두 겹으로 둘러 비닐을 씌우고, 돌과 흙으로 고정했다. 기온이 올라가는지 비닐 안쪽에 금세 뿌옇게 김이 서린다.
저만치 낙옆을 덮어준 마늘과 양파 밭이 눈에 밟힌다. 알뜰한 밭장이 지난해 쓰고 보관해둔 비닐을 꺼내더니, 뚝딱뚝딱 양파밭에 비닐 터널을 만든다. 모양이 제법 그럴싸했다. 땅속에 심은 마늘과 달리 양파 모종은 땅 위에 싹이 올라와 있어 추위에 더 약하다. 심을 때도 비닐을 덮어줄까 말까 망설였는데, 덮어주니 맘이 좋기는 하다.
2주 뒤인 11월25일, 부엌칼과 김장봉투를 들고 텃밭 동무들이 모였다. 예보는 아침 최저기온 영하 9도였는데, 춥긴 해도 그 정도까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올해 마지막 불을 피우는데, 비닐을 먼저 걷던 동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안심했던 비닐도 추위를 버텨주지 못했다. 배추 겉잎과 끝단이 얼어붙었다. 이걸 어쩌지, 삽시간에 분위기도 얼어붙었다.
모닥불에 녹인 손에 장갑을 꼈다. 배추를 캘 때는 한 손으로 배추를 옆으로 누르고 다른 손으로 밑동을 썰듯이 자른다. 얼어 딱딱해진 겉잎 몇 장을 조심스레 걷었다. 다행히 안쪽은 멀쩡했다. 가운데를 갈라보니 속도 제법 찼다. ‘이 정도면 김장할 수 있겠다’ 싶다. 동무들의 손놀림에 탄력이 붙는다. 뽑아놓은 무는 지상에 노출된 파란 부분이 대부분 얼었는데, 깎아서 먹어보니 맛은 좋았다. 주먹 크기 이상으로 자란 것만 갈무리해 나눴다.
김장 농사는 대체로 8월 중순에서 11월 하순까지 100일가량 이어진다. 처음 주말농장을 했던 북한산 텃밭 주인장은 “배추는 100일을 키워서 백추”라고 했다. 날씨가 갈수록 수상해지니, 내년엔 모종 내는 시기를 8월 초순으로 당겨볼까? 거둬 나눈 배추와 무를 짊어지고 나오면서 너나없이 썰렁해진 텃밭을 둘러봤다. ‘올해도 고마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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