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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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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칼럼이 기후 칼럼 돼 버렸네

경기 고양 편
이른 추위 대비 모종 빨리 냈더니 늦더위에 벌레 공세 ‘배추농사 이중고’
등록 2024-10-05 15:40 수정 2024-11-25 18:37
2024년 9월22일 벌레의 공격을 당한 텃밭 배추가 너덜너덜해져 있다.

2024년 9월22일 벌레의 공격을 당한 텃밭 배추가 너덜너덜해져 있다.


배추·무 값이 성층권까지 치솟았는데, 텃밭 상황이 말씀이 아니다.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지난여름 우리는 모두 ‘기후 난민’이었다. 여름은 끝났다. 지독하게 더디게 다가온 가을은 또 얼마나 잰걸음으로 우리 곁을 떠나갈까? 농사 칼럼이 자꾸 기후 칼럼이 돼가고 있다.

2024년 8월24일 예년보다 2주 빨리 김장용 배추 모종을 냈다. 이른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늦은 더위가 더 큰 문제일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일주일 만에 밭에 갔더니, 200주 낸 모종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바짝 말라 있었다. 부랴부랴 물을 듬뿍, 세 차례로 나눠줬다. 모종 주변에 복합비료도 충분히 줬다. 퇴비를 넣고 밭 세 고랑을 더 만들어 무씨를 뿌렸다. 해 질 무렵 갔는데도, 더워도 너무 더워 더는 일을 못할 지경이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텃밭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자리잡은 배추는 좀더 자랐지만, 말라붙은 배추는 꼴이 매한가지였다. 평균 80~90%는 되던 무 발아율은 그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한숨만 새나왔다. 일주일 뒤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그나마 자리를 잡았던 배추가 온통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좁은가슴잎벌레와 배추벌레의 동시 출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배추는 흡사 ‘엑스(X)-레이’ 사진을 찍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찔했다.

텃밭 막내가 부랴부랴 유기농 약재를 구해왔다. 벌레를 죽이는 살충제가 아니라 일종의 기피제다. 배추밭 고랑을 돌며 눈에 띄는 벌레는 잡고, 기피제를 잎에 뿌려줬다. ‘효과가 있을까? 모종을 다시 내기엔 시기가 너무 늦었는데….’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무밭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어 남은 씨앗을 빈 밭에 또 뿌렸다. 밭 두 고랑을 정리해 돌산갓도 뿌렸다. 김장농사를 위해 할 일은 이제 다 한 셈이다.

그 무렵 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동네 산책로에 긴팔 차림을 한 어르신이 늘기 시작했다. 밭은 어떨까? 주말을 기다리기가 유난히 지루했다. 다시 밭에서 만난 배추는 조금 나아진 모습이었다. 온통 갉아먹던 벌레들이 기피제를 피해 이사라도 갔는지, 새로 나온 배춧속이 제법 멀쩡했다. 잎과 잎 사이를 하나하나 살폈다. 아직 남은 벌레가 있긴 하지만, 이만하면 배추가 크는 속도가 더 빠를 것 같았다.

텃밭 첫해 배추 농사를 망친 뒤, 김장농사는 유기농을 포기하고 무농약으로 전환했다. 퇴비 충분히 넣어 밭을 갈고 모종을 낸 뒤 1~2주 안에 복합비료를 줬다. 영양 공급을 받은 배추는 막강한 초세를 뽐내며 무럭무럭 자랐고, 좁은가슴잎벌레와 배추벌레의 공세를 이겨낼 정도로 충분히 빨리 커줬다. 그런데 올해는 모종을 보름 앞당겨 낸데다 늦더위까지 기승을 부린 게 컸다. 배추는 시들시들한 반면 벌레는 더욱 왕성해졌으니, 이중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마른 밭에 물부터 듬뿍 준 뒤 막내가 가져온 기피제와 유기농 영양제를 배추에 또 뿌려줬다. 일주일 전 뿌린 무 씨앗 중 일부가 발아해 떡잎을 내놨고, 줄뿌림한 돌산갓 씨앗도 오종종한 떡잎을 빼곡하게 올렸다. 낮더위는 여전했고, 산모기의 공격도 매서웠다. 오랜만에 텃밭을 찾은 옛 밭장이 예초기에 시동을 걸더니 밭 주변을 정리한다. “풀 정리 안 하면 뱀 나와요. 해놓으니까 예쁘잖아.” 그가 피운 모깃불 연기가 텃밭을 에워싼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가을이 왔다고 속삭인다. 배추야, 힘내라.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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