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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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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고 볶으며 권태를 넘을 테다

강원 평창편
옥수수 800평 비탈밭 내년엔 나무 정원으로… 골치도 아프고, 재미도 있고
등록 2024-07-05 20:16 수정 2024-07-07 18:43
3년 전 심은 미스김라일락이 꽃을 피웠다. 누가 보든 말든 때가 되면 피고, 맡든 말든 향기롭다.

3년 전 심은 미스김라일락이 꽃을 피웠다. 누가 보든 말든 때가 되면 피고, 맡든 말든 향기롭다.


올봄 밭에 묘목을 심었다. 3년 재배한 왕매실 2주, 접목 1년차 청매실 2주, 왕벚나무 2주, 신령호두나무 2주, 무장 밤나무 2주, 옥광 밤나무 2주. 두 달쯤 지나 돌아보니 신기하게도 수종마다 둘 중 하나씩 살아남아 나뭇잎을 피웠다. 성공률 50%, 괜찮네.

농사지은 지 5년째. 처음 2년은 감자를 심었고, 3년차부터 올해까지 3년 내리 옥수수를 800평쯤 심었다. 왜 옥수수냐면 관리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힘든 일 재미난 일도 많았고 결실의 기쁨도 있었지만, 왠지 이제 재미없다. 작년까진 봄여름엔 거의 매주 갔는데 올해는 격주로, 그것도 부부가 따로 한 번씩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한 달 만에 밭에 가기도 한다. 그래도 옥수수는 잘 크고 밭은 잘 있다. 요즘은 금요일 저녁에 밭에 가서 이것저것 손볼 것 보고 토요일 차 밀리기 전에 후딱 돌아오고 있다. 밭에 머무는 시간이 24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생업이 바쁜 이유도 있지만 마음이 시들한 것이다. 직장도 연애도 정권도 3년이면 지겨워지는 게 인지상정인가.

이쯤 되니 왜 농사짓는가,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봤다. 5년 전, 모종의 사정으로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이 비탈밭 명의를 가족에게서 이전받았다. 세금도 허리가 휘도록 냈다. 밭을 놀리면 벌금이 나오기 때문에 이것저것 심었다. 심으면 뭐가 나오기에 심는 면적을 늘렸다. 농사지을 때 필요한 각종 도구와 기계를 샀다. 오며 가며 쉴 곳이 필요해 농막을 들여놓았다. 쉬고 놀자니 없으면 아쉬운 물건들이 생겨 조금씩 사다보니 창고에 뭐가 가득 들어찼다. 나름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1인으로서, 쌓여가는 물건을 보니 한숨이 난다.

이 모든 과정이 상황에 따른 대응이었다. 가려우니까 긁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문득 이걸 내가 정말 원했나 싶은 거다. 재배 면적이 커지면 심고 가꾸기도 힘들지만 거둔 뒤가 더 문제다. 팔기엔 애매하고 먹기엔 너무 많다. 나눠주는 데도 힘이 든다. 의사를 묻고 포장하고 택배를 부치고 멀지 않은 곳은 차로 돌며 배달하느라 시간도 돈도 마음도 많이 써야 한다. 한 가지 작물을 많이 재배하는 건 우리 같은 농부에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좀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나무를 심어보기로 했다. 봄에 이것저것 유실수를 심어본 이유다. 이제는 강원도가 주산지가 된 사과를 심을까, 기후위기로 강원도에서 매실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 번 심으면 200년은 산다는 호두를 해볼까. 우리 밭은 산에서 내려와 땅으로 스민 물이 나갈 곳이 없어 비만 오면 질퍽질퍽해진다. 배수가 안 되는 땅에선 나무가 살기 어렵다. 그래서 올가을 유공관을 심고 마을 우수로까지 관을 연결하는 대대적인 배수 공사를 하기로 했다. 관이 지나가는 이웃 땅의 주인과도 이야기를 마쳤다.

내년엔 봄부터 가을까지 철마다 열매를 수확할 수 있게 여러 나무를 심어야지. 예쁜 꽃도 포기할 수 없으니 이른 봄 피는 매화, 산수유, 목련부터 개나리, 벚꽃, 라일락까지. 한여름에 청량하게 피는 자귀나무도 포기할 수 없지.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마음 끌리는 대로 한 그루 한 그루 알맞은 곳에 심고 정성 들여 가꿔 아름다운 나무 정원을 만들 생각이다.

골치 아프면 그 땅 팔아버리라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다. 골치가 안 아프면 사는 게 심심해진다. 농사가 재미없으면 재미있는 농사로 바꾸면 된다. 이 땅에서 지지고 볶는 걸 자잘한 재미로 삼고 인생의 권태를 넘어갈 테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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