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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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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가 이렇게 사랑스럽긴 처음

전남 곡성 편
180평 밭 갈고 두둑 만들려 경운기·관리기 빌려 쓰다
등록 2024-07-13 14:07 수정 2024-07-17 13:23
관리기로 두둑을 만들고 있다.

관리기로 두둑을 만들고 있다.


땅을 갈았다. 자연농에서 땅을 가는 행위는 금기시된다. 땅을 간다는 건 오랫동안 만들어진 물길이며 지렁이 길, 두더지 길을 부수는 행위다. 갈아엎은 땅은 처음에는 반짝 많은 에너지를 토해내지만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깊이 땅을 갈아야 그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다. 땅을 갈면 그 밑에 숨어 있던 씨들이 일어나 더 많은 풀이 올라온다.

올해는 토종 콩과 팥, 들깨를 심고 싶었다. 마땅한 공간이 없다. 지난번 논 구할 때 속사정을 동네 분들께 이야기하니 노는 땅을 소개해주셨다. 180평 남짓한 밭이다. 이곳을 처음부터 자연농으로 하자니 햇빛에 노출된 지 오래돼 발로 비벼도 흙이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다. 이곳은 갈지 않으면 안 된다. 손으로? 무리다. 기계를 쓰자!

기계를 쓰자니 어떤 기계를 먼저 써야 하는지도 헷갈린다. 트랙터? 경운기? 관리기? 이름만 들어봤지 각자 어떻게 쓰는 건지 잊어버렸다. 이장님께 여쭤봤다. 우선 경운기로 땅을 갈고 관리기로 두둑을 만들면 된다.

이장님의 경운기를 빌려 땅을 가는 법을 배웠다.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인데도 날씨는 습하고 더웠다. 땀이 온몸에 비 오듯 흘렀다. 이장님이 보여준 대로 경운기를 돌려보려는데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경사에서 앞부분이 조금만 밑으로 쏠리면 앞으로 고꾸라진다. 그걸 잡느라고 경운기 뒷부분을 두 발로 눌러보지만 같이 끌려 올라간다. 이장님은 멀리서 한심한 듯 바라본다. 묵묵히 내가 하는 것을 봐주신다. 몇 번 뒤집어지고 나니 ‘아, 이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이러면 나만 힘들겠어’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 힘을 이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잘 조절해야겠다. 경사가 가파른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돌려야 경운기가 안 뒤집어진다. 스스로 깨달아 변하게 하는 이장님은 위대한 스승이다. 

‘콰콰콰콰콰’ 소리와 함께 경운기가 땅을 간다. 처음 땅을 가는 거라 온갖 모래 먼지를 뒤집어썼다. 어르신들이 하는 것을 봤을 땐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막상 내가 해보니 이렇게 고된 일도 없다. 자연농이 최고로 힘든 농법이라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다. 농사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보상은 매우 적다. 대한민국 인구의 96%를 지탱하는 이분들이(2023년 기준 농가 인구는 4%다) 우릴 먹여 살리기 위해 매년 이렇게 고생하셨구나. 그에 비하면 내 고생은 발톱의 때도 안 된다.

드디어 180평 밭을 다 갈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아직도 흙이 덜 갈렸다. 비가 온 뒤에 한 번 더 갈았다. 오후엔 이장님 트럭으로 면사무소에서 관리기를 빌려 와 두둑을 만든다. 옆 밭 어르신의 완벽한 시범을 보고 난 뒤 두둑 만들기에 도전했다. 경운기 한번 운전해봤다고 관리기는 좀 수월하다. ‘차캉차캉차캉’. 돌과 흙이 갈리면서 두둑 만드는 소리다. 비뚤어지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차근차근 하니 금방 만들어진다. 

기계 없으면 일주일 넘게 매일같이 땅을 갈고 두둑을 만들어도 부족했을 텐데, 기계 덕분에 순식간에 마무리했다. 손으로 농사지으며 인류 문명에 감탄한다. 기계가 이렇게 사랑스럽긴 처음이다. 그렇다고 매년 이 기계로 밭을 갈 건 아니다. 필요한 만큼 썼으니 한동안은 볼 일 없을 것 같다. 필요한 만큼만 쓰면 세상에 부족한 건 없다.

글·사진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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