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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된 오이·호박, 쓰러진 옥수수… 기후재앙 생존자는

경기 고양 편|폭우 탓 줄줄이 넘어진 옥수수, 풀로 포위된 호박·오이밭… 그 와중에 화사한 바질
등록 2024-08-02 19:02 수정 2024-08-08 15:26
장마 한가운데서도 바질이 늠름하게 자라 있다.

장마 한가운데서도 바질이 늠름하게 자라 있다.


장마철이 다가오면 대개 예초기를 돌린다. 가슴팍까지 자란 풀은 낫질로만 감당하기 버거운 탓이다. 부릉부릉 시동을 건 뒤 안전모를 쓰고, 크게 좌우로 팔을 흔들면 우수수 풀이 눕는다. 금속 날을 쓰는 예초기는 땅바닥의 돌도 많이 튀고 날에 물건이나 사람이 다칠 수 있어 조심스럽다. 우리 밭 예초기는 플라스틱 줄을 날로 쓴다. 길게 자른 날을 예초기 머리에 여러 바퀴 감아 사용하는데, 풀이 억세다보니 날이 금세 닳아버린다. 짧아진 날을 손으로 잡아당겨 늘이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땐 날이 달린 예초기 머리 한가운데를 딱딱한 바닥이나 돌 같은 데 대고 몇 차례 세게 내리친다. 그럼 희한하게 줄이 늘어난다. 원리는 모르겠고, 밭장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꿀팁’이다. 

7월 초 두 차례로 나눠 예초기를 돌렸다. 밭으로 드나드는 길을 내고 밭고랑 사이 통로도 정리했다. 예초기를 돌릴 땐 모른다. 일 마치고 동무들과 밥 먹으러 가서야 안다. 숟가락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쓰지 않던 팔 근육이 놀라서 그런 모양이다. 그 꼴이 우스워 다 같이 한참을 웃었다.

일이 생겨 한 주 쉬고 보름 남짓 만에 밭에 갔더니, 풀이 다시 수북하다. 그나마 베어낸 풀을 눕혀논 빈 밭은 사정이 낫다. 호박·오이밭은 풀이 아예 포위해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스콜처럼 세차게 퍼부은 소나기 탓인지, 반나마 영근 옥수수는 줄줄이 넘어져 있다. 할 일이 태산인데, 한곳에 고정된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연초록으로 화사하고, 향기로 은은한 바질밭이다.

바질을 처음 가꾼 건 텃밭 2년차 때다. 그해 어린이날 무렵 어느 도넛집에서 작물 가꾸기 체험용으로 상토와 바질씨를 나눠줬다. 큰애가 씨앗을 심고 열심히 물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토를 헤집고 새순이 고개를 내밀었다. 모종만큼 키워 밭에 내던 날, 아이는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별 기대도 안 했는데 바질은 무탈하게 잘 자라줬다. 잎이 어른 엄지손가락만큼 커졌을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는 이탈리아 배불뚝이 아저씨의 레시피를 유튜브에서 찾아 아이들과 피자를 만든 기억이 아련하다. 생바질을 구우면 얼마나 향이 깊어지는지 그때 알았다.

그 뒤로 바질과 함께 라벤더, 로즈메리, 페퍼민트, 스피어민트, 애플민트 등 각종 허브를 키우게 됐다. 바질은 한해살이지만, 다른 허브는 여러해살이다. 봄에 화훼단지에서 1천원, 2천원 하는 모종을 구해다 심으면, 몸집을 불리며 계속 줄기를 뻗어나간다. 허브류는 생명력이 좋아서 뿌리만 잘 내리면 해가 잘 들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도 씩씩하게 잘 산다.

바질은 해마다 새로 심어야 한다. 처음엔 가을에 거둔 씨앗으로 정성껏 모종을 키워 옮겨 심었다. 언젠가부터 꾀가 나 밭에 그냥 씨를 뿌리게 됐다. 지난봄 느지막이 새로 낸 밭에 뭘 심을까 동무들과 머리를 맞대다가, 뭐든 다 있다는 가게에서 데려온 바질 씨앗을 반 고랑 뿌렸다. 제법 발아가 잘돼 잎이 커진 바질을 두어 차례 뜯다가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흙을 덩어리째 퍼서 손으로 살살 털어 모종을 챙겼다. 열무를 뽑고 난 빈 밭에 한 줄에 서너 주씩 모종을 냈다. 옮겨 심고 처음 한두 주는 몸살을 앓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를 잘 잡고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장마 한가운데서 2주 만에 만난 바질은 늠름하게 자라 있었다. 몸을 숙여 잎을 따는데 순식간에 땀범벅이다. 한 잎 따 입에 물었다. 그래, 이게 바질 향이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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