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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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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밭에서 즐기는 ‘흠뻑쇼’, 이 맛에 농사짓지

전남 곡성 편
빗속에서, 땡볕 아래에서 심은 콩 모종…한줄기 시원한 바람에 더위도 고됨도 날려보내다
등록 2024-08-10 15:24 수정 2024-08-12 16:14
비 오는 날, 비 맞으면서 콩 모종을 심고 있다.

비 오는 날, 비 맞으면서 콩 모종을 심고 있다.


기계로 간 땅에 콩 모종을 심었다. 일부는 포트에 모종을 내고, 대부분은 땅에 모를 냈다. 땅에 모를 내면 뿌리가 깊게 내려 옮겨 심었을 때 건강하게 자란다. 콩의 종류는 된장 쑤어 먹을 순천327 메주콩, 밥에 넣거나 두유로 해 먹으면 맛있는 완주433 푸른콩, 콩나물을 키워 먹는 곡성17 나물콩, 팥죽도 쑤고 여름에 팥빙수도 해 먹을 장수94 꺼문팥 등이다.(토종씨드림에선 토종씨앗에 지역번호와 지역에서 불리는 이름을 붙여 씨앗 이력을 파악한다.)

모종을 키워 전부 옮겨심기까지 3주가 걸렸다.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원래 메주콩 종류는 6월에 심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토종씨드림에서 3년간 곡성과 고창에서 실험한 결과 남부지방에서는 7월에 파종하는 것이 알이 더 깨끗이 잘 맺고, 야무지게 수확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차라리 6월에 심었으면 괜찮았을까. 7월 중순부터 시작된 콩 심기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장마 기간이기 때문이다. 일기예보에 하필 비가 내린단다. 이때가 아니면 심을 수도 없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비 맞으면서 심자.

아침 일찍, 비 오기 전부터 심기 시작했다. 햇살이 구름에 가려지고, 습한 기운이 올라오더니 기어코 비가 내렸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바가지로 퍼붓듯이 쏟아진다. 내리는 비를 피할까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맞기로 작정하고 콩 모종을 심는다. ‘쏴아’ 내리는 빗속에서 콩 모종을 심는 기분이란, 발가벗고 숲속을 달리는 기분이다. 옷은 이미 다 젖었다. 몸속으로 빗물이 들어오면서 시원하다 못해 약간은 몸이 떨리기까지 한다. 모종 옮겨심기할 때 물이 필요한데 그 걱정은 덜었다. 퍽퍽 진흙 속에 콩 모종을 넣어주니 뿌리가 잘 활착된다. 콩밭에서 즐기는 흠뻑쇼가 따로 없다.

다음주, 토종씨드림의 가을 씨앗 나눔 시기가 겹쳐 한 주가 정신없이 흘렀다. 장마가 끝났다. 땡볕 더위의 시작이다. 어르신들은 이때가 되면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오신다. 해 뜨는 새벽 5~6시부터 나와 일하시고, 오전 8~9시면 귀가해 집에서 쉬신다.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으로는 어려운 지혜다. 새벽 7시쯤 뭉그적거리며 나가면, 어느새 어르신들은 집에 가시며 인사를 하신다. 해가 높이 뜨지 않은 시간인데도 땀이 줄줄 흐른다. 머리부터 나오는 땀은 몸과 다리를 지나 양말까지 적신다.

무자비한 더위 속에도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 때가 있다. 콩 모종 심기에 바쁘다가 시원한 바람에 고개가 들려 절로 미소 짓게 된다. ‘아, 시원하다.’ 한줄기 바람이 은행 에어컨보다 시원하다. 몇 년 전 모내기하던 도중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휙 하고 나를 감싸안았다. 그때 한 농부가 말했다. “아, 이 바람 때문에 내가 농사를 놓지 못하겠다니까.” 당시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 못했다. 힘들어 죽겠는데, 뭐가 좋다는 건지. 그때만 해도 농사의 힘듦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덥고 힘들어. 땀 그만 흘리고 싶다.’

하지만 이젠 비와 더위를 받아들였다. ‘비 맞지 뭐’ ‘땀 흘리면 어때’ 내 몸을 순순히 자연에 내맡긴다. 예상치 못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뼛속까지 시원해진다. 바람님이 주는 선물이다. ‘아, 이 맛에 농사한다.’

글·사진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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