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만에 밭을 찾았다. 김치 담가 먹으려고 심은 열무는 연분홍색 십자 모양 꽃을 활짝 피웠고, 나비들이 춤을 췄다. 맏딸이 좋아해 심었다는 루콜라도 허리 높이까지 자라 하얀 꽃이 만개했다. 잎을 하나 따서 먹어보니 씁쓸한 게 맛은 괜찮았지만 맏딸의 식탁에 무사히 오를지는 알 수 없다. 옥수수는 무릎 높이까지 오는 것부터 어깨까지 자란 것까지 들쑥날쑥. 오이랑 호박은 엉켜서 자랐다. 400평(약 1322㎡) 밭에 블루베리, 감자, 고추, 가지, 강낭콩, 양배추, 당귀, 곰취 등 30여 종이 몇 뼘씩 밭을 나눠 가졌다. 가족이 좋아한다고, 유튜브에서 봤다고, 친구가 심어보라 했다고 이것저것 심다보니 의도치 않게 정부의 ‘소품목 대량생산’ 농업정책에 반기를 들게 됐다.
2023년 7월3일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유촌리 용화산 자락에서 최석홍(77·전직 목사)·최국화(65·전직 교사) 부부를 만났다. 두 사람은 2021년 7월부터 이곳에 6평 농막을 세워 밭을 일구고 있다.
“서울 영등포 작은 교회에서 목회(목사가 교회를 맡아 하는 활동)를 하다, 2017년 은퇴했습니다. 농사짓는 친구 목사가 은퇴하면 꼭 농사지으라고 추천하더라고요. 너무 크게 하면 힘들지만 텃밭을 일구면서 손발을 움직이면 건강에 좋다고요.” 최석홍씨는 은퇴 뒤 삶의 거점을 이곳 농막으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두 사람은 2017년 강원도 홍천에 땅을 구해 농막을 지었다. 땅을 직접 보지도 않고 마음이 앞서 덜컥 계약했다. 하지만 상수도 연결은 물론 지하수도 팔 수 없는 지형이었다. 화장실도 재래식에, 집 바깥에 있어 영 불편했다. 밭은 산비탈에 있었는데, 비가 오면 토사가 쏟아져 내렸다. 첫 농막 생활은 그렇게 실패로 막을 내렸다.
화천 농막은 춘천 소양강에서 어업을 하는 여섯째 동생 석범(68)씨가 도와서 깐깐하게 골랐다. 석홍씨는 9남매 중 둘째다.
두 사람의 본집은 차로 2시간가량 걸리는 경기도 남양주 별내의 한 아파트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화천 농막에 오는데, 한번 오면 열흘에서 2주가량 지낸다. 이날도 아침부터 2주치 김치 등 먹을거리를 잔뜩 싸서 왔다.
최근(5월11일) 윤석열 정부가 ‘가짜 농부를 막겠다’며 농막에서의 야간 취침을 금지하려 한 것에 최국화씨는 “전혀 현실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농막의 법적 지위는 땅에 박혀 있지 않고 들어서 옮길 수 있는 ‘가건물’이다. 관련 법령(농지법 시행규칙 제3조의 2)에서는 ‘농작업 중 일시 휴식을 위해 설치하는 20㎡(약 6평) 이하 시설’이라고 규정한다. 이 ‘일시 휴식’이라는 조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야간 취침 금지’라는 정책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반대 여론에 백지화됐다.
부부는 이곳 400평 땅을 1억1천만원에 샀다. 남양주 집에서 가까운 경기도에 땅을 얻고 싶었지만, 대부분 가격이 수억원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고향인 강원도 동해·삼척은 너무 멀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기반도 사라졌다. 처음에는 100~200평 정도만 사려 했지만 그렇게 팔려는 사람이 없었다. 형편과 현실에 맞추다보니, 물 흐르듯 화천까지 흘러 들어왔다. 밭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블루베리 40주도 땅 주인이 ‘밭과 패키지’로 팔아서 반강제로 500만원을 더 냈다. 야간 취침 없이 농막에서 농사짓는다는 건 돈이 충분하다는 의미일 뿐, 농사 열정을 입증하는 아무런 근거도 될 수 없다. 부부는 농사를 잘 짓는다곤 못해도 농사에 진심이다.
“농막은 도시와 농촌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돌다리’ 구실을 해요. 귀농을 시도하는 도시 사람들은 농촌에서 치유와 힐링을 하기도 하고, 농민들에게 기술 지도 같은 도움을 받아요. 또 고령화로 소멸해가는 농촌 처지에선 농막에 사는 도시 사람들이 일손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농촌 물건을 사주기도 하고, 또 자연스럽게 이주도 하니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거죠. 사실 농민들도 거주지랑 농토가 멀면 농막에서 잠자기도 합니다. 정부가 농막 규제 강화를 철회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귀농·귀촌에 대해 강의하는 윤명혁 충북농업마이스터대학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
‘효율성’이 지상 가치가 되면서 ‘소품목 대량생산’ 농민만 진짜 농민이라 바라보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 부부처럼 식구를 위해 밭을 갈던 ‘소농’ ‘가족농’이 더 일반적이던 시절도 있었다.
“농사는 짓고 싶은데, 갑자기 모든 걸 버리고 농촌으로 가긴 겁나고…. 보통 그래서 농막에서 시작하는 거잖아요.”(최국화씨)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농막을 1300만원에 구매했다. 컨테이너 농막은 창문과 출입문 정도만 낸 200만원짜리부터 2천만원이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모델 한혜진씨가 2022년 11월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한 ‘목조 농막’(이후 법상 ‘농막’이 아닌 일반 집이라고 해명)과 같은 형태는 3천만원 이상이라고 한다. 여기에 상수도관이 들어와 있지 않아 지하수를 파는 데 500만원, 하수도를 옆집 정화조에 연결하는 데 350만원이 들어갔다.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개수대 하나 간신히 들어간 작은 싱크대가 있고, 변기와 세면대를 빼면 한 사람이 겨우 설 정도의 좁은 화장실 공간이 있다. 안쪽에는 가구라곤 의자와 책상, 침대가 전부. 전자제품은 텔레비전, 냉장고, 밥솥, 전자레인지 등이 있다. 그래도 남양주 집으로 돌아와 있으면 생각나고, 다시 돌아오고 싶은 ‘집’이다. 비우고 살아도 충분하다는 걸 화천 농막에서 두 사람은 매일매일 증명하고 있다.
“저걸 언제 다 따나.” 최석홍씨가 동쪽으로 길게 두 줄로 선 블루베리 나무 40주를 가리키며 ‘행복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블루베리는 이미 검보랏빛으로 달콤하게 익어 있었다. “블루베리를 어떻게 키우는지 잘 몰랐어요. 겨울에도 물을 줘야 하는데, 물을 안 줬죠. 그래서 지난해(2022년)에는 달린 게 별로 없더라고요. 지난겨울에는 물을 잘 줬어요. 그랬더니 너무 많이 달려서 이제 ‘어떡하나’ 그러고 있네요. 두 딸네 집에 보내고, 형제·지인들 나눠줘도 남을 거 같아요. 요즘 한 주먹에 몇천원씩 하던데, 저장할 방법이 없어서….”
평생 목사로 교사로 베테랑의 경지에 오른 뒤 은퇴했지만, 부부는 농사일이 처음이다. 그래서 부닥치는 것이 실패 또 실패다. “계속 농사지으면서 실패도 많이 하죠. 지난해에는 수박과 참외를 심었는데 전부 썩었고, 올해는 유튜브에서 보고 수미감자를 심었는데 이게 수확 시기가 2주 늦더라고요. 들깨를 심을 수 없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요. 농약을 안 치니까 고추 같은 건 병도 많이 걸리고. 그래도 꿈쩍거릴 수 있는 게 좋죠.”(최석홍씨)
서울에 사는 두 딸은 2년 넘게 화천 농막에 아직 들르지 않았다. 기자가 ‘서운하겠어요’라고 하니, 최국화씨가 “우리도 걔네들 오는 거 귀찮아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2011년 5~6월 국토연구원이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1천 명에게 ‘은퇴 후 농촌 이주 의향’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은퇴 후 농촌 이주를 희망한다’는 답변이 66.3%, ‘구체적인 이주 계획이 있다’는 답변도 13.9%에 이르렀다. 그만큼 베이비붐 세대에게 은퇴 후 농촌 이주는 귀소본능 같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23년 7월2일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장곡3리 농막에서 500평 농사를 짓는 김재훈(63)·윤경숙(66)씨 부부를 만났다. 2022년 5월 외지에 사는 땅 주인이 경작을 의뢰했고, 평소 농사짓는 것이 꿈이던 김씨가 맡기로 했다. 경기도 고양의 한 아파트에 사는 부부는 거의 매일 이곳 ‘컨테이너 농막’으로 출퇴근한다. 40년 넘게 석공으로 일한 김씨는 최근 일거리도 크게 줄어,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
“제가 고향이 충남 청양이고 아내 고향이 충남 논산입니다. 우리 세대는 ‘언젠가는 농촌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아야지’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냇가가 있고, 새와 풀벌레 소리 들리고, 이렇게 사는 게 우리는 자연스러워요. 옛날부터 봐왔던 거라 좀만 해보면 농사짓는 게 어렵지도 않더라고요.”(김재훈씨)
베이비붐 세대는 농촌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산업화 급물살에 형제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고 부모님마저 돌아가시니, 돌아갈 고향이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수도권에서 농사짓기란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 주변 땅값도 평당 50만원이 넘어간다. 500평이면 2억5천만원이 필요하다.
부부는 지인 소개로 맡은 이 밭을 계약서·임차료 없이 부치고 있다. “땅 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농사짓는 오늘이 너무 행복하다.”(김재훈씨) 둘러보니 옥수수, 고추, 오이, 토마토, 참깨, 수박, 참외, 콩, 더덕, 작두콩, 취나물, 생강, 고수까지, 이 집 역시 ‘다품종 소량생산’을 실천하고 있었다. “언제 뭘 심고 수확하는지 몰라도 이웃을 곁눈질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이날은 들깨 모종을 심으려고 밭을 일궜다.
컨테이너 농막 안에는 싱크대·소파·침대에 텔레비전 하나가 전부. 그래도 주말마다 두 아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찾아와 밭에서 뜯은 푸성귀를 대야에 한가득 담아, 바비큐 파티를 한다. 좁은 집에 엉켜 자도 그렇게 즐겁단다. 이날 막내 손주 산(9)이 입이 삐쭉 나와 있었다. ‘음료수 사 먹게 돈 좀 달라’고 했다가 할아버지한테 혼이 났다. 아침에 이미 하나 먹었던 터다. 산이에게 ‘농막에 오는 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와이파이도 안 되고 싫어요”라고 한다. 그래도 할아버지랑 밭에서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더니 할아버지를 꽉 껴안았다.
화천(강원)·파주(경기)=글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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