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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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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피해 아동에게 봄볕 같은 추억을 주는 ‘우리집’

그룹홈
학대 피해 아동이 사는 공동생활가정, 시설이 아닌 집으로 만드는 ‘엄마’ 임채연씨
등록 2023-08-06 12:01 수정 2023-08-08 22:23
원가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아동·청소년이 머무는 그룹홈 ‘봄볕’의 시설장인 임채연씨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그는 소파를 아이들이 집처럼 느끼도록 하고 싶어서 거실에 두었다.

원가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아동·청소년이 머무는 그룹홈 ‘봄볕’의 시설장인 임채연씨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그는 소파를 아이들이 집처럼 느끼도록 하고 싶어서 거실에 두었다.

넓지 않은 거실이지만 소파만큼은 들이고 싶었다. 다른 집처럼 오늘 학교와 학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실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고, 과일을 나눠 먹고, 때로 놀기도 하는 집을 만들고 싶었다. 임채연(49) ‘봄볕’ 그룹홈 시설장에게 소파는 아이들에게 그런 집을 만들어줄 수 있는 가구였다. 거실 면적의 약 3분의 1쯤 되는 진한 파란색 소파를 둔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소파 하나 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하겠지만, 그가 본 다른 그룹홈들은 교육 목적으로 소파 대신 커다란 책장에 책을 빼곡하게 꽂아두었다.

“어떤 아동 그룹홈(공동생활가정)은 딱 들어가자마자 다른 집들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여긴 시설이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요. 저는 최소한 거실만큼은 아이들이 여기를 시설이 아니라 집처럼 느끼도록 하고 싶었어요.”

오늘부터 이모 말고 엄마

물론 ‘보통 집’과 다른 티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거실과 이어진 주방 한쪽 벽면에 ‘봄볕 소식란’이라는 글씨가 붙은 게시판에는 아동 응급대처 매뉴얼, 종사자와 의료기관·소방시설 비상 연락망이 적힌 종이가 코팅된 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임씨는 “보통 일반적인 집에 저런 게 붙어 있지는 않으니 아쉽긴 하다”고 했다.

경기도 화성시 한 아파트 단지에 있는 ‘봄볕’ 그룹홈은 2020년 문을 열었다. 2023년 7월 현재 봄볕에선 남자 아동·청소년 3명이 생활한다. 7살 막내 최태환(가명)군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박승준(10·가명)군은 초등학교에 다닌다. 두 명이 그룹홈에서 매일을 지내고, 제일 큰형인 고등학교 1학년 김민재(16·가명)군은 수도권 외 지역에서 기숙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주로 주말에 머무른다.

부모의 학대나 방임 등으로 원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없는 아동들은 가정 바깥에서 보호받는다. 피해 아동들은 아동일시보호시설, 공동생활가정(그룹홈), 보육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동양육시설, 위탁가정 등에서 보호받게 된다. 성인인 종사자들이 번갈아 근무하며 24시간 아동과 청소년을 돌본다.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되면 각 지역의 아동보호전문기관은 먼저 아동학대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학대 피해가 있다면 지자체는 이 아동을 원가정으로 돌려보낼지, 단기나 중장기 보호시설로 보낼지 등을 심의해 결정한다.

그룹홈과 아동양육시설은 중장기 보호 공간이다. 만약 원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할 경우, 아동과 청소년들은 이곳에서 지내다 자립한다. 양육시설은 한 시설에서 아동·청소년 수십 명이 거주하지만, 그룹홈의 입소 정원은 7명이다. 또 그룹홈은 별도의 시설이 아니라 단독·공동주택에 자리잡고, 간판이나 표찰을 외부에 달지 않아 겉으로만 봐선 일반 가정과 구분하기 어렵다. 시설에 거주하는 아동·청소년보다 이곳에 거주하는 이들이 느끼는 사회적 낙인감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을 모양에 따라 분류해 보관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을 모양에 따라 분류해 보관했다.

혈연으로 묶인 사이는 아니지만, 아이들은 임씨를 ‘엄마’라고 부른다. 처음엔 ‘이모’라고 불렀다. 임씨도 그게 익숙했다. 아이들의 엄마가 된 것은 2021년 승준이가 태환이에게 한 말이 계기가 됐다. 친모를 만나고 돌아온 승준이가 태환이에게 “너는 엄마 없잖아”라고 말했다. 원가족과 교류하는 승준이와 달리 태환이는 부모와 만나지 않는다. 승준이의 말에 발끈한 임씨는 선언했다. “엄마가 왜 없어? 여기 있잖아, 오늘부터 다 (호칭은) 엄마야!”

임씨는 어린이집을 오랜 기간 운영했다. 임씨는 사회복지사 집안이다. 임씨의 5남매는 전부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다. 며느리, 사위도 사회복지사다. 임씨는 어린이집을 접은 뒤, 먼저 그룹홈에서 일하던 언니가 권유해 2018년부터 한 그룹홈의 사무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2020년 봄볕을 열었다.

워터파크, 공연, 여행… 엄마가 밤새우는 이유

두 아이는 원가족의 학대와 방임으로 문을 연 해 봄볕에 왔다. 태환이의 가족은 태환이를 집에 홀로 두고 저녁에나 돌아왔다. 어린 태환이가 주로 먹은 음식은 피자였다. 입소할 당시 태환이의 콜레스테롤 수치는 정상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친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태환이의 동생을 임신 중이던 친모는 출산 뒤 계부와 함께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아이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태환이의 존재를 수소문하다 임씨에게 연락이 와서 알게 됐다. 친모와 교류하는 승준이도 원가정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다. 폭력적인 계부는 친모에게 의자를 집어 던졌다.

두 아이에게 “뭘 먹고 싶니?”라고 물어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대답은 각각 피자와 라면이다. 아이들의 말은 임씨에게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원가족과 살 때 자주 먹었기 때문에 아이들 입에 익숙한 음식이기 떄문이다. 그는 “나는 아이들 입에서 이 말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봄볕 식구들은 7월 3~4일 경기도의 한 워터파크에 다녀왔다. 아직 성수기 운영시간이 적용되지 않아서 2시간 정도밖에 물놀이를 하지 못했다. 여력이 된다면 또 다녀오려고 한다. 아이들이 “엄마, 여기서 일주일만 있으면 안 돼요?” 하며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려면 정부 보조금과 후원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아동 한 명에게 지급되는 생계비는 62만원, 주거비는 15만원이다. 정부가 매달 지급하는 시설 관리운영비는 47만원이다. 이 밖에 지방정부마다 지원하는 금액이 있지만,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다. 임차료를 내고, 장을 봐서 아이들 먹거리를 마련하고, 학원비 등을 충당하기에도 모자라다.

이런 이유로 임씨는 밤을 새워 사회복지법인 등에 사업계획서를 제안한다. 선정되면 프로그램을 수행한 뒤 결과보고서를 써서 낸다. 얼마 전 다녀온 워터파크도, 아이들과 수시로 보러 가는 연극·뮤지컬 등 공연도,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본 강릉·제주도 여행, 지방자치단체의 방학캠프도 그의 제안서가 선정돼서 가능했다.

이 업무가 시설장의 강제나 의무 사항은 아니다. 인원이 많은 보육원과 크게 다르지 않게 운영되는 그룹홈도 있다. 임씨가 봄볕을 개소하기 전 일했던 곳에서는 방학 때면 아이들은 방 안에 누워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이기만 했다.

시설이 아닌 집, 아동의 권리
아이들이 잠자고 공부하는 방.

아이들이 잠자고 공부하는 방.

단순히 안전과 의식주가 보장되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임씨는 “아이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걸 경험한 뒤 ‘엄마,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하면 힘들었던 게 사르르 녹는다”고 말했다.

임씨는 4월 영국 소년합창단 ‘리베라’의 내한 공연을 본 승준이가 “엄마, 천사들의 목소리 같아요”라고 말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꼼짝 않고 공연에 집중하던 승준이는 감동으로 벅차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런 순간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2024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국외 여행을 가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외부 활동을 하기 전부터 아이들의 기대감이 엄청 크거든요? 가는 날에는 가는 날이어서 좋고, 다녀온 뒤에도 그 경험이 어땠는지 이야기가 이어져서 좋아요. 단순히 ‘갔다 왔다’로 끝난다면 힘들었겠죠.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보호대상 아동에게는 ‘시설’이 아니라, 발달상의 권리가 보장되는 ‘집’이 제공돼야 한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아동복지연구소는 2022년 초 이런 내용을 담은 ‘보호대상 아동 주거경험 및 주거실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공간적 속성이 강조되는 ‘시설’과 사회적 속성까지 포함하는 ‘집’을 구분하고, 가정 외 보호대상 아동에게 집과 같은 환경을 최대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거라는 개념은 단순히 ‘주택’ 같은 건물의 형태로 설명할 수 없다. 시설은 물리적 속성이 강조되는 반면, 집은 아동이 자신의 가족과 상호작용하면서 소속감과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공간 등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연구진은 “아동에게 ‘나’로 성장할 수 있는 ‘나의 공간’과 ‘나의 사람’이 있는 ‘집’은 필수불가결한 권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아동의 권리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발달권’과도 무관하지 않다. 발달권은 아동이 충분히 교육받고, 여가를 즐기고, 문화생활을 하는 등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제공돼야 하는 권리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다 자립하기를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태환이는 경계선 지능,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았다. 학대 피해 아동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 증상이다. 임씨는 “아이가 여기서 상호작용하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하면 지능이 향상되는 사례를 정말 많이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두 아이는 여느 초등학생과 다르지 않은 나날을 보낸다. 아침 7시30분쯤 식사하고, 8시35분쯤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수업이 끝나면 수학·태권도 학원에 간다. 저녁 6시40분쯤 집에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는다. 학교 숙제나 학습지를 풀거나, 책을 보다가 밤 8시30분~9시에 잠이 든다. 집 안 곳곳에 봄볕에서 지낸 아이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승준이 생일인 7월5일에는 미역국과 생일 케이크를 먹었다. 아마 승준이와 태환이는 ‘우리 엄마’ ‘우리 이모와 삼촌’과 ‘우리 집’인 봄볕에서 지내다 자립할 것이다.

글 서혜미 기자 ham@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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