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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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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소가 많이 사는 마을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동물해방물결, 국내 첫 ‘소 생크추어리’ 인제에 조성… 30년 내다보는 ‘해방촌’ 모험 시작해
등록 2022-08-08 05:49 수정 2022-08-09 08:23
2022년 6월30일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과 주민들이 ‘소 보금자리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은 뒤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 신월분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2022년 6월30일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과 주민들이 ‘소 보금자리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은 뒤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 신월분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강원도 춘천과 양구군·인제군에 걸쳐 동서로 구불구불 166.2㎞ 뻗은 소양호(소양강댐)의 상류에 있는 인제군 남면 신월리는 사방이 온통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한적한 섬 같다. 지형이 초승달(新月)을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신월리엔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이 산다. 택배회사들도 배달을 거부하는 오지 마을에는 지금 주민 85명(실거주 기준·48가구)만 살고 있다. 청년은 정말 귀하다. 20대는 단 한 명도 없고, 30대도 두 명뿐이다.

그런데 이곳에 소가 새로 오면 사람도 온단다.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고 지구환경을 보호하는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청년들이 신월리로 모여들고 있다. 무슨 일일까.

2022년 가을 홀스타인 집이 생긴다

2022년 6월30일 부슬비가 내렸고, 신월리를 둘러싼 월산엔 물안개가 내려앉았다. 마을회관 앞뜰엔 알알이 영근 자두며, 달콤한 복분자 등 과실나무가 가득했다. 마을회관 안에서는 국내 첫 ‘소 생크추어리(Sanctuary·보금자리)’인 ‘인제 해방촌’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식이 열렸다. 동물권 단체인 ‘동물해방물결’과 신월리 주민들로 구성된 영농조합법인 ‘달 뜨는 마을’이 협약을 맺었다. 동물해방물결 회원 5명과 신월리 이장, 감사 등이 조촐하게 수박 몇 접시를 올려놓고 박수 치며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젊은 분들이 우리 마을에 와주신 것만으로 감사하고, 마을이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손영식 신월리 마을 이장이 환영 인사를 건넸다.

이날 맺은 협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월리와 동물해방물결이 힘을 합쳐 폐교된 부평초교 신월분교 터(9918㎡)와 시설을 활용해 △동물 보금자리 △책방(인제 풀무질) △비건 청년마을 등으로 구성된 인제 해방촌을 앞으로 최소 30년간 조성·운영한다. 또 신월리 농촌체험 휴양 프로그램의 개발·운영과 농산물 유통·판매 증진을 위해 노력한다.

관련 인·허가 절차를 거쳐 이르면 2022년 9월 인제 해방촌이 정식으로 문을 연다. 현재 인제군의 한 농장에 임시 보호 중인 3살 된 ‘홀스타인’ 남자 소 ‘6명’이 신월분교 터에서 앞으로 30년간 살게 된다.(‘홀스타인’은 사람에게 주로 우유를 제공하는 유럽에서 유래한 소의 한 종류이다. 인간 중심적인 표현을 지양하고자 동물권 단체들은 ‘젖소’라는 표현 대신 ‘홀스타인’을, 동물을 셀 때 쓰는 ‘마리’ 대신 목숨이라는 뜻의 ‘명’(命)을 사용한다.) 인천시 계양구 한 목장에 살다가 도축 직전, 동물해방물결이 구조해낸 머위·메밀·미나리·부들·엉이·창포가 그 주인공이다.

생크추어리는 ‘성스러운 곳’ ‘성역’이라는 뜻으로 성경 시편에 등장하는 말이다. 1986년 미국의 동물보호 운동가 진 바우어는 랜캐스터에서 양 힐다(Hilda)를 구조한 뒤 ‘생크추어리 농장’(Farm Sanctuary)을 세웠다. 당시 대형화·공장화된 가축 사육장에서 키워지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동물 사체 더미에 버려진 힐다는 구조된 뒤 1997년까지 건강하게 11년을 더 살았다. 생크추어리는 인간의 착취, 학대에서 구출된 동물들의 안식처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소를 대상으로 한 생크추어리가 시도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생크추어리를 마련하는 일이 녹록하진 않았다. 소들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찾기까지에만 6개월가량이 걸렸다. 이지연 동물해방물결 대표는 “한국에선 생크추어리가 낯설고, 할 공간도 마땅치 않다. 2021년 두 달가량 4500여만원을 모금해 소를 구조한 뒤 안정적으로 평생 보호할 곳을 찾아다니다 임시로 인제군 한 축사에 공간을 마련했다. 그러다 신월리를 알게 됐다. ‘저희는 동물도 살리지만 마을도 함께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주민 설명회에서 말씀드렸고, 신월리 주민분들이 흔쾌히 동의해주셨다”고 말했다. 손영식 이장은 “대화를 나눠보니 ‘동물도 살고 마을도 산다’는 얘기가 허투루 하는 게 아니라 진실되게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 마을에선 올해 예순인 내가 애들 축에 속한다. ‘이 젊은 분들이 마을에 오면 학교(신월분교)도 다시 살릴 수 있겠구나’ 싶었고, 고맙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인제 해방촌이 들어서게 된 신월분교는 2019년 3월 둘밖에 되지 않던 전교생 중 한 명이 중학교에 진학해 문을 닫았다.

2022년 5월29일 인제군 한 목장에 임시 보호하는 소. 2021년 8월 인천의 한 축사에서 도축 직전에 구조됐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2022년 5월29일 인제군 한 목장에 임시 보호하는 소. 2021년 8월 인천의 한 축사에서 도축 직전에 구조됐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젊은이들 기다리는 마을도 흔쾌히 동의

이날 오후 협약식 참석자들은 해방촌의 책방 등으로 탈바꿈할 교정을 둘러봤다. 운동장은 망초 같은 잡초들이 빽빽하게 차지했지만, 자물쇠를 열고 교사로 들어서자 강낭콩반·민들레반 교실 문패가 깨끗하게 걸려 있었고, 텅 빈 교실 안 칠판엔 분필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 학교 졸업생인 이용재 신월리 감사는 “사람이 와서 살아야 전처럼 학교도 살고 마을도 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졸업생 김경림 ‘달 뜨는 마을’ 사무장은 “(수몰된) 아랫마을에 살다가 1973년 땅 있고 잘사는 사람들은 보상받아서 떠나고 어려운 사람들만 학교와 함께 이 윗마을로 올라왔다”고 옛일을 떠올렸다.

이렇게 청년과 아이가 귀한 신월리에 동물해방물결 20~30대 회원들이 나타나면서 주민들의 기대도 커졌다. 2022년 5월 회원 4명이 신월리로 주소를 옮겼고, 앞으로 5년간 60명이 아예 이주하는 것을 동물해방물결은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 단순히 고기를 안 먹는 한 사람의 소비자로 남기보다 고기를 생산하는 농업생산 및 소비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탈서울·유기농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려는 비건 또는 비건 지향자가 많다고 동물해방물결 쪽은 설명한다.

동물해방물결은 인제 해방촌 관련 연간 600명 이상의 관계인구(정기·부정기로 오가며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인구)가 신월리를 거점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계획도 밝혔다. 회원 등을 대상으로 신월리에서 키운 옥수수·고추·명이나물·블루베리·두릅 등의 농산물을 소개할 예정이다.

소 살림이 마을 살림이고 ‘지구 살림’

이용재 감사는 “인제군 축산계에서 혹여 축산농가와 부딪치지 않을까 걱정하던데, 막상 만나 얘기하면서 괜한 걱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희망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우려 때문에 업무협약서에는 ‘동물해방물결은 인제군에서 집회·시위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조항도 포함됐다.

신월리에는 주민 수(85명)보다 훨씬 많은 한우 2천여 ‘명’이 사육되고 있다. 동물이 고기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구조에 나서는 동물권 단체와 고기를 만들기 위해 소를 키우는 축산농가들…. 동물해방물결과 신월리의 협업이 다소 어색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김경림 ‘달 뜨는 마을’ 사무장은 “반려동물 키우듯이 소를 키우는 걸 왜 반대하겠느냐”며 “처음엔 반대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이 30년 내다보고 일하겠다고 하니까 주민들이 모두 ‘더 도와주자’ 하고, 이장 등이 공무원·군의원들을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유럽 등에선 축산농장이 생크추어리로 전환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2020년 서울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부텐란트>(Butenland)는 독일인 얀 게르데스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대규모 농장을 생크추어리로 바꾸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2009년 개봉한 한국 다큐멘터리영화 <워낭소리>도 노부부가 40살 된 소 누렁이와 ‘가축’ 이상의 관계를 맺으며 동고동락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한 해 도축되는 96만여 ‘명’의 소에 견줘 저희가 구조한 6‘명’이 얼마나 적은지… 그 무게가 느껴질 때마다 힘든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도 힘들다고 아무것도 안 하거나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되잖아요.” 이지연 동물해방물결 대표가 말했다. 축산물안전관리시스템을 보면 2021년 7월부터 2022년 6월까지 1년간 국내에서 도축된 소는 96만3998‘명’이다. 이 대표는 “우리가 하려는 건 소들이 고기로 키워지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고, 인간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실제로 가능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탈육식에 대한 인식을 확산해가는 긴 여정을 시작하려는 것”이라며 “소 살림이 마을 살림이고, 지구 살림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 생태순환 농업도 시도하려 한다”고 말했다.

“탈육식 인식 확산하는 긴 여정”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세계 무역질서가 바뀌면서 대규모 밀집·착취형으로 탄소배출이 많은 한국의 축산을 이제는 방목 축산과 같은 기후위기 극복형으로 전환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하니 인제군 공무원들도 공감했다. 동물을 같은 생명체로 보듬는 친구들이 왕래하면 (친환경 축산업으로의 전환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기대했다. 그는 “한국 전체적으로도 이런 축산 전환에 많은 준비가 필요한데, 정부가 그런 준비를 전혀 안 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15년 4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낸 보고서를 보면 축산업과 관련해 인간이 만들어낸 온실가스는 7.1기가톤(Gt)으로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14.5%를 차지한다. 비건 청년들과 신월리 주민의 약속이 한국 축산업을 전환하는 첫걸음이 될지, 앞으로 30년이 궁금하다.

인제(강원)=글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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