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존 스노우’입니다. 맞아요. 인기 미국 드라마인 <왕좌의 게임>의 멋진 주인공 이름을 땄어요. 저도 주인공처럼 암갈색 근육질 몸과 이마에는 멋진 흰색 줄무늬가 있어 그렇게 이름이 붙은 것 같아요. 8살이고 경주마로 쓰는 ‘서러브레드’ 종이에요. 원래는 경기도 과천 경마장에서 뛰었어요. 경주를 뛰며 탄 우승 상금이 2억6900만원에 이를 정도로 A급 경주마였죠.
지금은 제주도의 넓은 목장으로 왔어요. 이 목장에는 저같이 경주마로 살다가 퇴역한 말 등 말 33마리가 있어요. 무리 지어 생활하는데, 아저씨는 제가 기존 무리와 섞이기보다는 따로 무리를 짓는 게 낫다고 판단해 저를 관리해주고 계세요. 무리 안에 서열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는데, 저는 자존심이 강한 말이거든요. 이 목장에는 저보다 좀더 키가 작은 ‘한라마’가 더 많아요.
오늘은 아저씨가 제 발굽도 시원하게 다듬어줬어요. 말은 발굽이 계속 자라는데 다듬지 않으면 깨질 수 있거든요. 그리고 얼굴에 시원하게 진드기 퇴치약도 뿌려줬죠. 여기는 야생이라 진드기가 많아서 얼굴이 가렵거든요. 아, 시원해. 히이이잉.
여기 일과는 경마장에서 상금을 벌기 위해 바쁘게 일하던 때와는 달라요. 아침이 되면 아저씨가 산속에 들어가 있는 우리를 불러요. 그러면 우르르 뛰어나와서 아저씨가 주는 사료와 풀을 먹죠. 그러고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누워서 잠을 자요. 말도 누워서 자냐고요? 말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누워서 자요. 히이이잉. 밤에는 어두우니 항상 주위를 경계하느라 제대로 잠을 못 자거든요. 오후에는 아저씨와 함께 뛰어놀다가 저녁밥 먹고 밤 10시 정도에 다시 산으로 올라가요. 이것을 사람들은 ‘방목’이라 부르더라고요.
아저씨는 저에게 행복해 보인다고 말해요. 저는 경주하다 다쳐서 퇴역했죠. 경주마일 때 주인은 다친 저를 계속 돌보는 것을 포기했대요. ‘제가 벌어들인 우승 상금이 얼마인데’라는 배신감이 앞서더라고요. 주인이 포기한 말들은 보통 폐기되거나 승마장에 보내져요.
‘운이 좋아’ 승마장으로 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안장을 올려놓고 사람을 태워야 해요. 물만 먹으며 배고픈 상태로 박차(신발 뒤축에 댄 톱니 모양의 쇠)에 차이면서 계속 움직여야 해요. 승마장으로 못 간 친구들은 사실 행방을 잘 몰라요. 우리 같은 말을 기록하는 한국마사회 ‘말산업 정보포털’(호스피아) 통계를 보면, 2021년에 퇴역한 경주마(서울·부산 기준)는 1768마리예요. 이 가운데 승용마는 583마리, 폐사된 말은 111마리인데 용도 미정은 무려 1072마리예요. 60.6%에 이르는 경주마가 경마장을 떠난 뒤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어요. 퇴역한 경주마들은 4살 이하가 1249마리로 대부분 어릴 때 어디론가 가요. 이처럼 용도 미정인 말이 2019년에는 822마리였고, 2020년에는 780마리였어요. 말의 평균수명은 25~35살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제주에 와서 숲속을 자유롭게 거니는 저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죠. 지금 제 주인은 폐사될 뻔한 저를 구조해 여기 생크추어리(Sanctuary·보금자리)를 운영하는 김남훈 아저씨에게 저를 돌봐달라고 맡겼어요. 저는 드라마 속 존 스노우처럼 죽을 고비를 넘겨 운이 좋은 경우죠.
경마장에서 빨리 뛰지 못한다고 도태되는 건 우리와 맞지 않는다고 아저씨가 위로해줬어요. 사람들은 서부영화나 경마장만 보고 말이 뛰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뛰기보다 24시간 내내 풀을 뜯고 지내는 동물이에요. 포식자가 노릴 때만 도망치기 위해 냅다 뛰죠. 잘 뛰지 못한다고 학대받고 고기가 돼야 할 동물이 아니에요.
퇴역 경주마를 도축해 식용으로 쓰는 문제는 페타(PETA·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라는 국제동물권리단체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어요. 페타 조사관이 2018년 4월부터 2019년 2월까지 10개월 동안 위장잠입해, 경기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주마들이 제주시 애월읍 축협축산물공판장에 실려와 인부들에게 머리·몸 등을 무차별로 맞은 뒤 다른 말이 보는 앞에서 도살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죠. 이 말들은 경주 때 생긴 부상 등을 치료하기 위해 약물도 주입하기 때문에 식용으로 하기에 부적합할 수 있는데 말이죠. 제주 지역에서 도축되는 말고기는 연간 약 300t 규모로 전체 말고기의 80%를 차지한다고 알려졌대요. 한국마사회 매출만 7조원(2019년 기준)이 넘을 정도로 한국 경마산업을 위해 뛰었지만, 이를 위해 몸 바친 말은 그냥 고깃감이 되는 거죠.
심지어 제주에는 ‘창고행’이란 것도 있대요. 쓸모없어진 경주마를 사서 인적이 드문 창고에서 불법 도축하는 거예요. 고기는 먹고 남은 말뼈로는 건강보조식품 ‘말 엑기스’를 만들어 팔아요. 원래 식용으로 키우는 말도 있지만 그런 말은 비싸니, 폐기되는 경주마를 데려다 이런 짓을 한다는 거예요. 보통 날이 추워지는 11월부터 은밀하게 창고행이 벌어져요.
지금 저를 키우는 김남훈 아저씨도 페타에서 나온 말 학대 영상을 보고 충격받고 말 생크추어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대요. 프로골퍼 출신인 아저씨는 그동안 제주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는데, 고향에서 말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 직접 나선 거죠. 2019년 고향에 돌아온 아저씨는 마을 공동목장 68만 평을 빌렸어요. 길도 없이 야생 상태로 남아 있던 이곳에 초지도 만들고 우리가 맛있게 먹을 풀도 자라게 했어요. 2020년 11월부터 말을 구조해 데려왔어요.
아저씨는 오전과 저녁에 사람들에게 골프를 가르치고 번 돈으로 우리에게 줄 사료도 샀어요. 여기 널린 게 풀과 나무지만 식성이 좋은 우리가 먹기 시작하면 숲이 금방 황폐해지거든요. 그래서 아저씨는 맛 좋은 사료를 사다가 우리에게 나눠줘요. 아저씨가 밥을 준다고 부르면 숲으로 놀러 갔던 말들도 잽싸게 내려와서 아저씨를 따라가죠.
오늘 생크추어리에는 서울에서 우리 소식을 듣고 <한겨레21> 기자도 왔어요. 아저씨는 제주도에서만 하는 한라마 경주가 2022년 말까지 하고 끝나는 것에 걱정이 커요. 한라마는 제주마와 외국에서 온 경주마를 교배해 나온 말이에요. 제주 경마장이 다시 예전처럼 전통 제주마 경주로만 운영하기로 하면서, 한라마가 모두 사라질 처지에 놓인 거죠. 도축된 한라마의 고기 가격은 ㎏당 1만3천원에서 2500원까지 떨어졌다고 해요.
아저씨는 “우승 상금을 위해 무분별하게 말을 키우다가 이제 와서 필요 없다고 도태시키는 게 말이 되냐”고 해요. 아저씨는 없어질 위기에 처한 한라마를 모아 역사와 혈통을 보존하는 목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해요.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경주마의 특성을 1년 정도 목장에서 순응시킨 뒤 사람들과 함께 놀 수 있는 말로 만들겠다는 거죠.
후원자도 생겼어요. 아저씨가 혼자 33마리를 키우기는 버겁잖아요. 한 달에 얼마 후원금을 낸 사람들은 주말에 아이들과 와서 우리와 놀아요. 말을 타고 산책도 하고 목욕도 시켜주죠. 우리를 만지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도 즐거워요. 히이이잉.
2022년 7월9일에는 제주에서 ‘도축장 가는 길’ 행진도 열렸어요. 생명환경권행동 제주비건과 제주동물권행동 나우가 공동으로 행사를 열어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걸었다고 해요. 제주 경마장에서 ‘퇴역 경주마의 삶을 보장하라’라고 쓰인 펼침막을 들고 도축장 앞까지 걸었대요. 2021년 11월 시작한 행진이 벌써 9번째래요.
말 생크추어리를 가끔 찾는 제주비건 회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주비건은 환경보전과 기후위기 대응, 채식 보급 등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인데 동물권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대요. 특히 돈벌이로 이용되다 도축되는 경주마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네요. 비건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비건소사이어티라는 국제기구는 비거니즘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대요. “음식, 의복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해 모든 방식의 동물에 대한 착취와 학대를 배제하는 것을 추구하는 철학이자 삶의 방식, 동물, 사람, 환경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대체 방식의 개발과 사용을 지지함.”
우리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김란영 제주비건 대표님도 비건운동과 동물권운동이 같이 가야 한다고 하세요. 경마산업과 말산업을 위해 열심히 질주했던 우리가 퇴역당한 지 72시간도 안 돼 도축되거나 학대당하는 사건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퇴역 경주마보고 “저 말은 제주도로 간다”고 말하는 건 말고기로 팔려간다는 뜻이죠. 이런 제주의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김 대표님은 홍콩처럼 퇴역 경주마를 1등이건 꼴등이건 체계적으로 재활시키고 다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해요.
김란영 대표님은 “말은 인류와 지구를 빛나게 해주는 아름다운 존재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친구가 돼줘야 할 차례”라고 말씀하세요. 우리와 함께하는 분이 점점 많아져서 이제 안심돼요. 여러분도 친구가 돼주세요. 히이이잉.
* 한국마사회는 이 기사의 퇴역 경주마의 용도미정 분류와 관련해 2021년은 407마리, 2020년은 206마리, 2019년은 89마리라고 알려왔습니다. 기사에서 인용한 말산업정보포털에 대해선 일부 오류가 있었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제주=글 이완 기자 wani@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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