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멀지 않은 제주시 한림읍의 한 길가. 큰 코끼리가 그려진 하얀 벽을 지나 미닫이문을 열려고 하니 문에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었다. ‘VEGAN’(비건), 비건 카페인 줄은 알고 찾아왔는데 ‘There is No Planet B’(지구 외 대체 행성은 없다), 우크라이나 국기 위에 쓰여 있는 ‘No War’(전쟁 반대) 등의 스티커들도 방문자를 함께 반겼다.
2022년 6월30일 저녁 6시께 한림읍에 있는 ‘AND 유 CAFE’(앤드유카페)를 찾았다. 계산대 앞에도 메뉴판 대신 손님을 향한 ‘주문’이 붙어 있었다. “쓰레기 섬이 되어가는 제주를 지키기 위해 테이크아웃 용기 사용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안쪽 테이블에는 비건 관련 책과 프로그램 소개 책자가, 벽면에는 ‘바다를 지키자’ 등 포스터와 그림이 잔뜩이었다. 유혜경 앤드유카페 대표는 “제일 열심히 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건 알리기와 일회용품 쓰지 않기예요. 여기 관광객분이 엄청 많이 왔는데 혼나고 가요. ‘테이크아웃 해주세요’ 하면 저는 ‘안 됩니다’라고 해요”라고 말했다.
앤드유카페는 제주에선 꽤 알려진 비건 카페 겸 식당이다. 2018년 한림읍의 한적하고 오래된 집을 개조해 카페로 문을 열었는데 이제는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이나 외국인, 비건 연예인까지 한번씩 들렀다 가는 이른바 ‘비건 핫플레이스’가 됐다. 매출 규모도 껑충 뛰었다. 이날도 점심에 손님이 식당을 가득 채울 정도로 몰려들어 유 대표와 함께 일하는 직원은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지친 기색 없이 유 대표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이건 제 소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운이 너무 좋아 유명해지니 제 목소리에 힘이 생긴 것 같아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정말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할 기회를 준다는 데 저는 감사하거든요.” 꿈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 오기 전 네덜란드에 여행을 갔다가 비건 식당을 찾아갔어요. 완전 창고 같은 곳에서 하는 식당이었는데 일하시는 분들이 모두 봉사자이고 메뉴는 딱 코스 하나밖에 없었어요. 모든 재료는 로컬 농산물이고 수익금은 지역 단체를 위해 쓰는 곳이었죠. 일반인도 그냥 오지만 동물권이나 정치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와서 같이 밥도 먹고 회의도 하는 게 너무 좋아 보여서 저도 그런 걸 해보자 생각했죠.”
‘커뮤니티를 구상한 것인가요’ 묻자 유 대표는 “좋은 문화가 발생하는 곳이면 좋겠다 싶어 시작했어요. 여기 보시면 전부 다 메시지가 있거든요”라고 답했다. 유 대표가 가리키는 벽면엔 제주의 돌고래가 그려져 있고,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포스터가 있었다.
제주에 오기 전 그는 영국에 있었다. 디자인 관련 일을 하던 그는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2015년 10월 영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유기농과 비건, 기후위기 등 ‘지속가능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접하고, 정말로 삶을 바꾸었다. “영국에 왜 비건 인구가 많을까 신기해서 강의 같은 것을 찾다보니, 축산업과 낙농업 그리고 (사료로 쓰는 콩을 재배하기 위한) 열대우림 파괴와 농약 문제가 너무 심각한 거예요. 그걸 보고 더는 육식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완전히 탁 끊었어요.” 그는 식당에 취업해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다. 집 근처 유명한 비건 식당에 매주 찾아가 음식 맛을 보고 집에서 요리법을 연구하고 연습했다.
그러고는 2018년 4월1일 식목일에 맞춰 제주에서 비건 카페를 열었다. 경기도 포천에서 자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그가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언니가 제주에 먼저 와 있다가 여기에 가게 자리가 났다고 추천해줬어요. 여기가 (이렇게) 잘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진짜 운이 좋았던 게 근처에 국제학교들이 있거든요. 외국인 선생님이 많은데 거기에 채식하는 분이 많았던 거죠.”
채식 음식에 목말랐던 외국인들은 앤드유카페가 열리자 몰려들었다. 빵과 케이크 위주로 메뉴를 짰던 유 대표는 “(외국인들이) 매주 오는데 같은 것을 먹일 수 없어” 식사 메뉴까지 여러 종류를 개발해야 했다. 대안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어 국제학교’의 존재가 아이러니하게 비건 카페의 성장을 도운 셈이다.
유 대표는 코로나19로 잠시 멈추었던 커뮤니티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10여 명과 함께 비건 관련 책 읽기 모임을 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주말에 한 번씩 채식하는 모임을 열거나 함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모임을 카페에서 열었다. 그는 “전에는 사람들이 비건이 뭔지도 몰랐고 ‘여기는 뭐 하는 데야?’ 했는데 이제는 알긴 아시는 것 같다”고 웃었다.
흑돼지를 안 먹으면 악취가 줄어요앤드유카페가 있는 한림 지역은 제주에서도 축사가 많은 곳이다. 제주에 온 관광객들이 ‘흑돼지’구이를 찾으면서 수요가 늘어 돼지 사육 규모가 커졌고, 축사에서 나오는 오폐수와 악취 등은 현지 지역민의 골칫거리가 됐다.
“제가 축산업을 막을 수는 없죠. 그러나 흑돼지를 찾는 이들에게는 (고기) 수요가 줄면 악취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해요. 제주 당근이나 옥수수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제주의 땅과 바람을 사랑하는 그는 말했다. “제주에 사는 동안 기후가 바뀌는 것을 체감하니까 걱정이 너무 돼요. 그것을 보면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요. 계속해야죠. 저마저 멈추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제주=글 이완 기자 wani@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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