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톨스토이, 제임스 캐머런, 빌 클린턴, 스티브 잡스, 김제동, 임수정…. 이들의 공통점은? 베지테리언(Vegetarian), 즉 ‘채식주의자’이다. 그들 중 일부는 고기 음식뿐 아니라 동물을 착취해 얻어지는 모든 생산물을 거부하는 비건(Vegan)을 실천하거나 지향했다. ‘비거니즘’이란 용어는 20세기 중반 탄생했지만, 그 개념의 뿌리는 기원전 3000년 고대 인더스문명까지 가닿는다. 비거니즘의 출발점이자 핵심 전제는 ‘동물에 대한 착취와 불필요한 고통에 반대’하는 것이다.
“산업화한 동물농장에서 가축을 다루는 방식은 어쩌면 역사상 최악의 범죄다.” 호모사피엔스(현생인류)의 빅 히스토리 <사피엔스>(2011)를 쓴 유발 하라리가 2015년 7월 영국 일간 <가디언> 기고에서 한 말이다. 하라리는 다른 인터뷰에서, 인류의 농업혁명과 동물의 가축화를 서술하면서 산업형 사육동물의 비극에 깊이 공감해 채식주의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대다수 사람에게 비건은 쉽지 않은 도전, 불편한 진실일 테다. 동물에 대한 태도를 넘어 일상생활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에 대한 오해와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동의와 실천 여부를 떠나, 비거니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한 이유다. 비거니즘을 둘러싼 여러 쟁점을 비건 입장에서 정리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물권 운동가이자 임상심리학자 아푸르바 마단, 한국의 해양환경활동가이자 작가 김한민 등 여러 비건의 저술과 관련 학계의 연구 성과를 참고했다.
안타깝지만, 애당초 그런 건 없다. 죽음을 원치 않는 생명체를 어떻게 인도주의적으로 죽일 수 있나? 지구 위 동물의 98%는 인간이 만든 공장식 사육장에서 태어나 자라고, 도축장에서 다른 동물의 비명을 들으며 죽는다. 서식 환경은 대부분 옴짝달싹하기 힘들 만큼 비좁고 불결하다. 새끼 돼지는 고통 완화 없이 이빨이 잘리고, 닭은 컨베이어벨트에서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차례로 칼날에 목이 잘린다. 소는 도축 전에 전기충격기로 기절시켜야 하지만 수차례 충격에도 멀쩡해 목숨이 붙은 채 해체된다. 젖소 농장에서 수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돼 어미 소의 젖 한 번 물지 못하고 도살된다. 이 모든 게 ‘합법적’이다. 인간의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 대부분은 일생을 극심한 신체적, 정서적 고통 속에 살다가 죽은 동물에서 얻어진다.
동물만 고통을 느끼나? 식물은?동물과 달리 식물이 의식을 갖거나 물리적 고통을 느낀다는 증거는 없다. 식물은 통증 감각에 관여하는 중추신경계나 통각 수용체가 없으며, 통각을 지녀야 할 진화적 필연성도 없다. 일부 식물은 특정 화학물질을 방출하거나 접촉과 소리에 반응하는 등 동물의 방어와 생존 행동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식물도 의식과 감각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동물의 고통 회피와 식물의 자극 반응은 목적이 다르다.
동물이 신체적, 감정적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척추동물은 인간과 신체 구조가 같으며, 인간과 똑같은 신체언어(비언어적 의사소통)로 표현한다. 동물도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고, 훌쩍거리고, 물러서거나 움츠리고, 달아나고, 학습된 무력감에 우울해지며, 정신적 충격으로 극도의 경계심과 불안감을 보인다. 증명되지 않은 식물의 고통보다 과학으로 입증된 동물의 고통을 당장 멈추는 게 합리적이다.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동물의 절대다수는 야생에서의 자연 번식이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인류(세계 인구)의 10배 가까운 약 700억 마리의 동물이 매년 인간의 먹을거리로 태어나, 자연수명보다 훨씬 짧은 삶을 마치고 소비된다. 대다수 사람은 지구에 그토록 많은 동물이 단지 착취당하고 죽기 위해 태어난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거의 깨닫지 못한다. 대부분 공장식 축산시설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육류와 모피, 가죽제품 등 동물 착취 제품의 수요가 줄어든다면 사육동물의 수도 줄어들 것이다. 전형적인 수요-공급 모델이다.
사자처럼 육식만 하는 동물도 있는데.육식동물은 말뜻 그대로 생존하기 위해 다른 동물을 먹는다. 인간은 육류 말고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다. 무엇보다 인간은 본능에 따르는 동물과 달리 이성적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의 윤리를 동물의 생태 행동과 비교하는 건 억지스럽다. 동물은 필요한 만큼만 먹으며, 재미로 사냥하거나 먹을 것을 잔뜩 쌓아두지 않는다. 그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다른 동물을 공장에 가두고 노예처럼 착취하지 않는다.
인간의 육식은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비만, 심장질환, 고혈압, 당뇨 등 현대인의 질환 상당수가 육식과 관련이 있다. 2015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가공육을 발암물질 ‘그룹1’로, 적색육(붉은색 고기)을 발암물질 ‘그룹2A’로 분류했다. 발암물질 그룹1은 암을 일으킨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는 물질로, 담배·석면 등이 포함된다. 발암물질 그룹2A는 위암 또는 대장암 발병과의 관련성이 관찰된 물질이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곡물이나 과일을 주식으로 먹었고 육식은 이따금 하는 정도였다. 사냥 기술과 도구가 발달하면서 육식이 점점 늘었지만 지금처럼 일상화한 것은 20세기 들어 공장식 축산이 발명되면서다. 수십만 년 인류 역사에서 지금 같은 육식 문화는 길게 잡아도 100년이 채 안 된다.
인간의 몸도 초식동물에 더 가깝다. 치아 대부분이 어금니처럼 식물성 음식에 적합한 맷돌형이며, 가장 날카롭다는 송곳니도 뭉툭해서 육식동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구강 구조도 악어나 고양이과 동물처럼 위아래로 씹는 게 아니라 초식동물처럼 곡식을 으깨고 갈아먹기 좋도록 상하좌우로 움직인다.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고릴라, 오랑우탄 같은 영장류는 모두 채소와 과일만 먹는 비건이다. 인간과 유전자의 98%가 같다는 침팬지가 영장류 중에선 유일하게 동물성 먹거리를 간식으로 즐긴다. 침팬지의 육식은 흰개미 같은 작은 곤충이나 새알이 대부분이며, 작은 포유류 동물을 사냥하는 것도 극히 드물다. 침팬지의 식단에서 육식성은 6%에 불과하다.
일부러 육식을 거부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자연스럽다’는 의미가 뭘까? 그 개념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바뀐다. 지금 ‘자연스러운’ 많은 것이 수백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러움은 적응하고 진화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도덕적 진보’도 포함된다.
송곳니를 비롯해 인간의 신체적, 생리적 특성 일부를 들어 ‘인간은 육식하게 돼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육식이 마치 우주적 질서에 대한 순응이라는 믿음처럼 설득력이 없는 억지 논리다. 동물을 소비하기 위해 강제 임신시키고, 비좁고 불결한 공간에서 사육하고, 어미와 갓 태어난 새끼를 떼어놓고, 억지로 살을 찌운 뒤 도축하는 공장식 축산이야말로 자연을 거스르는 행태다.
채식만으로 충분한 영양과 건강, 체력을 유지할 수 없잖아.
고릴라, 코끼리, 코뿔소, 바이슨, 말의 공통점은? 대형 초식동물이다. 그것도 힘이 아주 세다. 사람은 어떨까? 순수한 채식인 사찰 음식은 대표적 건강식으로 꼽힌다. 불가 수행자의 영양과 체력을 걱정하는 건 난센스다. 단백질은 통곡물, 콩과 식물, 채소, 씨앗·견과류 등에서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다. 식물단백질에는 단백질 흡수를 돕는 필수 아미노산 일부가 부족하다는 건 과거의 지식이다. 미국 비영리기구 ‘책임 있는 의료를 위한 의사회’(PCRM)의 내과 전문의 존 맥두걸은 베스트셀러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에서 이렇게 밝혔다. “식물은 완벽한 단백질의 풍부한 원천으로 손색이 없다. (…) 식물단백질만으로도 필수 아미노산과 비필수 아미노산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다. 식사할 때 이 음식들을 (단백질의 상호보완을 위해) 혼합할 필요도 없다.”
반면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되는 육류는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많다. 밀집 사육 환경에서 빈발하는 전염병을 막기 위한 항생제 남용도 심각하다. 현존하는 항생제의 절반이 공장식 축산 동물에게도 쓰이는데, 이는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을 키운다. 2020년 7월 세계보건기구(WHO)는 “항생제 내성이 오늘날 세계 보건과 식품 안전에 가장 큰 위협 중 하나(…), 인간과 동물에 대한 항생제 오·남용이 문제를 가속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동물에 도덕적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하기 위해 꼭 동물애호가가 될 필요는 없다.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간명한 이유로 동물을 인간과 똑같이 대하자는 거다. 애완동물, 반려동물, 관상용 동물, 식용동물 등 인간이 자의적 용도에 따라 동물을 분류하고 선택적으로 편애하는 게 문제다. 어떤 동물은 극진히 사랑하면서 어떤 동물은 마구 대하고 죽이는 건 모순이다. 고래 사냥의 잔혹함에 분노하면서 사자 사냥을 몰래 즐기고 공장식 축산에는 눈감는 것, 그런 태도를 ‘종(種) 차별주의’라 한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예컨대 전통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초원의 유목민은 주식인 고기와 젖을 비롯해 가죽, 연료까지 생존에 필요한 많은 것을 가축과 야생동물한테서 얻는다. 유목민은 다른 대체식품의 선택지가 거의 없어, 육식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먹거리다. 그들의 도축 과정은 은폐되지 않으며, 남에게 가축의 대량 사육과 살상을 위탁하지도 않는다.
고기가 아닌 유제품은 괜찮겠지?유제품도 동물의 고통과 착취의 결과물이다. 유제품 양산을 위한 우유는 이렇게 얻어진다. 젖소 암컷의 강제 임신 → 어미 소 출산 직후 새끼 강제 분리→ 수컷은 도살, 암컷은 젖소로 사육 → 어미 소의 수유 기간 착유 → 젖(우유)이 끊기면 또 강제 임신→ 나이 들어 생식능력이 떨어지면 도축. 이런 과정은 전세계의 유제품 수요를 맞추기 위해 대규모로 되풀이된다. 낙농업이 발달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만 출생 직후 도축되는 새끼 수컷이 연간 70만 마리다. 이 나라 낙농업계는 또 매년 9만 마리의 암소를 중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수출하는데, 대부분 강제 임신 상태에서다. 도축과 사육을 위해 수출된 ‘잊힌 동물들’은 최소한의 동물권조차 보호받지 못한다. 동물권 운동가들은 “낙농산업이 동물 착취의 가장 잔인한 형태”라고 말한다.
인간이 동물에게 인간의 결정을 강요한다는 게 문제다. 동물은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육식과 채식의 선택은 빨간색과 파란색 바지의 선택과는 전혀 다르다. 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이해한다. 그러나 육식 선호는 습관이자 익숙함일 뿐 생존에 필수적 행위가 아니다. 맛과 기호의 충족을 위해 동물에게 고통을 주고 살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식물성 대체육처럼 좋은 대체식품도 많다.
비건은 육식이 동물에게 불필요하고 잔인한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소비자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변화는 침묵이 아니라 발언에서 시작된다. 대다수 사람은 누군가 눈앞에서 동물을 학대하는 걸 목격하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그 행위를 말리고 싶어진다. 비건의 차이점이라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수많은 동물이 겪는 고통에도 똑같이 공감한다는 것이다. 비거니즘은 종교적 신념이나 절대자에 대한 믿음 같은 게 아니다. 동물 착취와 대상화를 거부하는 사회정의 운동이자 도덕철학이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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