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 에너지난이 한창인 가운데 가스와 원자력이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다. 2022년 7월6일 유럽의회가 ‘유럽연합 지속가능 분류체계(Taxonomy·택소노미)’에 가스와 원자력을 포함하는 법안을 가결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으로 한국의 ‘녹색분류체계’에 원자력을 포함하겠다는 새 정부의 계획이 가속화할 전망이다. 분류체계가 왜 중요한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근본적 고민이 필요한 때다.
분류체계는 환경목표에 기여하는 경제활동의 기술 기준을 말한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금융기관도 녹색채권이나 지속가능채권 등 ‘녹색투자’의 수요가 커지는데 어떤 사업이 진짜 ‘녹색’인지 기준이 없다는 것이 문제로 떠올랐다. 사업자는 각자 논리를 들어 환경에 기여한다고 주장하지만, 투자자가 매번 기술적 검증을 하기 어려울뿐더러 검증에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6가지 환경목표(기후변화 완화와 적응, 순환경제로의 전환, 생물다양성과 생태계 보호 및 복원 등)를 설정하고 환경에 기여하는 사업의 구체적 기술 기준을 제시한 것이 분류체계의 핵심이다.
분류체계의 활용도는 매우 넓다. 먼저 별다른 환경적 편익이 없는데도 녹색인 척하는 ‘그린워싱’(Green Washing)을 효과적으로 걸러낸다. 실제 2021년 국내에서 발행된 녹색채권 상당수가 석탄화력발전소의 설비 개선에 쓰였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분류체계가 제도적으로 안착하면 기업 매출 가운데 녹색사업 비중이 얼마인지, 금융기관의 투자자산 포트폴리오에서 녹색자산 비중이 얼마인지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를 공시에 포함해 기업과 금융기관의 지속가능성 평가 때 객관적 척도로도 쓸 수 있다.
유럽연합의 분류체계에 결국 포함됐지만, 가스와 원자력은 지속적인 논란 대상이었다. 분류체계 기술표준 제정 작업을 맡은 유럽연합의 기술전문가그룹(Technical Expert Group)은 가스에 대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감축해야 할 대상인 화석연료”라며 “다른 전력 부문에 적용한 온실가스 배출 기준인 100g/㎾h를 훨씬 상회하는 270g/㎾h를 가스에 적용한 것은 일관성을 해친다”고 지적했다. 또 원자력에 대해선 “온실가스 배출은 적지만 핵폐기물, 사고 위험, 온배수의 생태적 영향, 우라늄 채굴·가공 과정의 환경영향 등을 고려하면 ‘심각한 피해를 일으키지 않을 것’(Do No Significant Harm)이란 (택소노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유럽연합의 분류체계는 6가지 환경목표 달성에 기여하면서 그 과정에 다른 환경목표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분류체계 논쟁이 한창이던 2022년 4월 필자는 유럽연합의 방문 프로그램을 통해 유럽연합 주요 기관들이 자리한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실무자와 시민사회 활동가를 만났다. 현지 실무자들은 가스와 원자력이 포함된 집행위 법안이 정치적 타협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특히 유럽 기후단체 E3G의 츠베텔리나 쿠즈마노바 정책자문은 “자국 원전산업을 보호하려는 프랑스와 재생에너지 전환이 초기 단계인 회원국들의 요구가 작용하다보니 분류체계에 가스와 원자력을 결국 포함했지만,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에너지 전환을 이룬다는 유럽연합의 기조에는 실질적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집행위가 가스와 원자력을 분류체계에 포함하고 유럽의회가 이를 승인했다는 것이 유럽연합의 에너지정책 기조 변경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유럽연합 분류체계가 실제 가스와 원자력에 적용하는 기술 기준을 살펴보면 이런 평가를 수긍할 수 있다. 먼저 가스발전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270g/㎾h 이하여야 한다. 일반적인 가스복합화력발전소의 경우 350g/㎾h 전후이기 때문에 이보다 적은 270g/㎾h 이하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려면 열병합발전을 하거나 높은 비용을 들여 탄소포집장치(CCS)를 추가해야 한다. 그만큼 조건이 까다롭다. 원자력의 경우 ‘사고저항성 연료’(Accident-Tolerant Fuel)를 써야 하고, 동시에 2050년까지 고준위 핵폐기물을 처리할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노심이 냉각 기능을 상실한 경우에도 핵연료의 건전성을 장기간 유지해 사고 위험을 줄이는 사고저항성 연료는 아직 상용화된 기술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지원하에 사고저항성 연료 개발을 진행 중이지만 2030년에 인허가를 받는 것을 목표로 한다. 원자력과 관련한 전통적 고민인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현재 전세계에서 사용후핵연료를 포함한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장을 운영하거나 건설 중인 나라는 스웨덴, 핀란드, 프랑스뿐이다. 이마저도 수십 년의 조사와 협의를 거친 결과다.
결국 내용을 따져보면 원자력과 가스가 포함됐다는 것이 실질적인 의미를 갖기 어렵다. 정치적 타협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유럽연합은 오히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40%에서 45%로 상향하고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1067GW에서 1236GW로 대폭 확대해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낮춘다는 ‘리파워(RePower) EU’ 정책을 2022년 5월 발표했다. 2021년에 탄소감축 법안인 ‘핏포(Fit for) 55’를 발표한 지 1년 만에 재생에너지 전환을 한층 더 가속화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원자력과 가스에 적용된 기술 기준을 정확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유럽연합보다 먼저 가스를 녹색분류체계에 포함하면서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340g/㎾h로 설정했다. 340g/㎾h 기준은 신규로 건설되는 가스복합화력발전소라면 열병합발전이나 탄소포집장치 없이도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이다. 유럽과 달리 ‘통상적’ 가스발전소도 ‘녹색경제활동’에 포함한다는 의미다. 녹색분류체계가 추가 기준으로 “설계 수명 기간 동안 평균 250g/㎾h를 달성할 수 있는 중장기 감축 계획”을 요구하지만, 이 조건은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금융투자는 사업 초기에 이뤄지기에 사업계획상 수소나 암모니아 혼소 등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겠다는 ‘계획’만 있으면 달성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녹색분류체계가 이처럼 현저히 느슨한 기준을 채택하면 분류체계의 도입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진다. 분류체계는 ‘무엇이 녹색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이 신호에 따라 투자 판단의 비용을 줄여주는 구실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 ‘녹색’인 것이 국외에서 ‘녹색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된다. 결국 투자자뿐 아니라 기업도 녹색분류체계에 따른 채권 발행이나 공시 작성을 꺼리면서 가치를 상실할 위험이 다분하다.
재생에너지 투자 시장이 안정적으로 형성됐고 정부가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전환 기조를 뚜렷하게 제시하는 유럽과 달리, 한국은 재생에너지 투자 시장이 여전히 작다. 이런 상황에서 녹색분류체계는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분명한 태양광과 풍력 등의 재생에너지 투자를 확대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그런데 녹색분류체계에 가스나 원자력 같은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 편입되면 녹색금융에 유입되는 자금 대부분을 이런 대규모 사업이 가져가버릴 위험이 크다. 금융기관의 실무적 측면에서는 동일한 ‘녹색’사업이면 적은 수의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이 많은 수의 사업에 소규모 투자하는 것보다 관리 비용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명백한 신호 기능 수행해야녹색분류체계는 기후금융 정책의 핵심 요소로 작동하는 표준이다. 녹색분류체계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녹색을 녹색이라 하고, 녹색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명백한 신호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고장 난 신호등은 오히려 더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린워싱을 막기 위해 만든 분류체계가 본래 목적에 맞게 기능할 수 있도록 우리 녹색분류체계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한 때다.
윤세종 플랜 1.5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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