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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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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선언은 얼마나 허무한가

탈핵은 탈원전으로 다시 에너지전환 정책으로, P4G 정상회의는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주요 참가국 서명 거부
등록 2022-05-09 01:11 수정 2022-05-09 11:47
2017년 6월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 정지 선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2017년 6월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 정지 선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블라블라블라”(Blah Blah Blah).

스웨덴의 청소년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했던 이 말은 2021년 유엔기후변화협약 회의장의 주요 구호였다. 우리말로 ‘어쩌고저쩌고’란 뜻이다. 각국 정상들이 기후위기를 막겠다고 30년 동안 국제회의를 하며 어쩌고저쩌고 듣기 좋은 말만 할 뿐 행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기후위기나 환경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정치인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말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결과적으로 무엇이 바뀌었느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5년 기후·에너지 정책의 한계는 명확하다.

‘신고리 함구령’까지 내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의 기후·에너지 정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2017년 6월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행사에서 밝힌 ‘탈핵시대 선언’이다. 문 대통령은 “원전 정책을 전면 재검토해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시대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고리 1호기 폐쇄를 결정한 때는 박근혜 정부인 2015년이다. 당시 새누리당은 당대표, 부산시장, 울산시장, 지역 국회의원까지 고리 1호기 폐쇄로 입장을 바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 폐쇄 행사에 신임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낼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신고리 5·6호기 백지화와 신규 핵발전소 건설 중단, 노후 핵발전소 폐쇄를 공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행사에서 나온 ‘탈핵’이란 말은 발언 직후 보수언론과 원자력계의 비판에 부딪히자 ‘탈원전’으로 바뀌었다. 몇 달 뒤에는 ‘에너지전환 정책’으로 바뀌었다. 이는 단지 표현만 바뀐 게 아니라 정책도 바뀜을 의미했다.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공약은 ‘사회적 공론화를 통한 결정’으로 바뀌었다가, 2017년 10월 결국 건설 재개 결정이 내려졌다. 공론화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 내부엔 ‘신고리 5·6호기 함구령’까지 내려졌다. “여당이 대선 공약 실현에 관심이 없고 시민단체들만 앞세운다”는 비판이 탈핵 운동 진영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문제를 두고 도입된 ‘한국형 공론화 방식’은 이후 전국적으로 수십 차례 진행됐다. ‘국민 대표’로 수백 명의 시민참여단을 꾸려 전문가들의 설명을 듣게 한 뒤 찬반을 결정하게 하는 방식이다. 제주 영리병원 공론화처럼 결과가 뒤집히기도 하고, 사용후핵연료 공론조사처럼 결과 조작 의혹이 제기돼 검찰이 수사하는 등 ‘사회적 공론화’를 둘러싼 불신이 가중되기도 했다.

핵발전소 문제는 문재인 정부 말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흐릿해졌다. 2022년 2월 문재인 대통령은 “향후 60여 년 동안 원전을 주력 기저 전원으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거 ‘탈핵시대 선언’은 무엇이냐는 비판을 찬핵과 탈핵 진영 모두에서 받았다. 노후 핵발전소인 월성 1호기는 폐쇄 과정의 문제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담당 국장이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2023년 수명 만료를 앞둔 고리 2호기의 폐쇄 계획을 밝히지 않은 채 임기를 만료하게 됐다. 차기 윤석열 정부는 고리 2호기의 수명 연장을 추진 중이다.

고리 2호기 폐쇄 계획 밝히지 않은 채

거창한 선언과 이후 부실한 정책 추진은 기후위기 대응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2015년 파리협정 체결 이후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한다는 ‘1.5도 목표’ 달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요구가 거셌지만, 한국은 여전히 ‘기후 악당’이란 오명을 안고 있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이 있었다. 흑백 화면으로 텔레비전에 생중계된 ‘2050 대한민국 탄소중립 비전 선언’은 이벤트로서는 훌륭했으나 정부 계획은 부실했다.

국내 첫 환경 분야 다자간 회의 성과로 홍보됐던 피포지(P4G·녹색성장과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 정상회의는 결국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영국, 독일, 프랑스, 유럽연합(EU) 등 참가국들이 서명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만큼 국제 흐름과 우리나라의 격차는 컸다. 정부 스스로 ‘1.5도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인정한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 그나마 불확실성이 큰 국외 감축분의 증가, 현재도 계속되는 신규 핵발전소 건설 사업, 온실가스 감축으로 피해를 보는 노동자, 중소상공인 등에 대한 정의로운 전환 계획 부실 등 문재인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이 부실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또 문재인 정부의 기후정책은, 녹색을 빙자한 대기업·토건산업의 성장전략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저탄소 녹색성장’과 명확히 차별점을 긋지 못했다. 기존 ‘저탄소녹색성장 기본법’을 대체할 법이라며 더불어민주당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탄소중립 기본법’은 결국 녹색성장 내용이 대거 포함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이 됐다. 법 이름만 바뀐 게 아니라, 실제 ‘한국판 그린뉴딜’ 행사장에 대기업 총수들이 참가하는가 하면, 예산 중 상당 부분이 전기차·수소차 보급 예산으로 채워져 있다. 온실가스 감축 계획이 아니라, 대기업 특혜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대규모 토건사업인 가덕도 신공항, 제주 제2공항, 새만금 신공항 등 공항 건설 사업 또한 문재인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이 결국 ‘녹색성장 시즌2’였음을 잘 보여준다.

170석 이상의 거대 여당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 기후·에너지 정책의 가장 큰 교훈은, 준비 없고 제도화되지 않은 선언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미 기득권을 가진 거대 산업의 재편 계획과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의도한 바와 달리 세상은 거꾸로 간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태양광, 풍력 갈등과 불신이 대표적이다. 이를 단지 보수야당과 언론의 ‘가짜뉴스 탓’만 하기에는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 크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핵발전소의 단계적 감축,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 목표 등 문재인 정부가 성과라고 얘기했던 것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다. 정부의 역할은 단지 선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동의를 끌어내고 이를 제도화해 말 그대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거꾸로 간다. 이런 상황이 여소야대 정부가 아니라 170석 이상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 정부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참 놀랍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헌석 정의당 녹색정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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