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홍제천을 면한 도로의 신축 아파트에서 한 블록 더 들어가면 한적한 주택가가 펼쳐진다. 골목을 따라 걸으면 1층에는 ‘보틀라운지’ 유리 선팅만 있을 뿐 간판이 없는 카페가 있다. 카페 유리문이 끝나는 곳에 ‘채우장’이라고 손으로 쓴 글씨가 ‘아래 방향’ 표시를 매달고 있다. 3월8일(월요일로 휴무일) 정다운(41) 대표가 카페 문을 열면서 취재진을 맞는다. 여기는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누구에게는 지구의 미래를 의탁하는 곳, 적어도 사람에 대한 의심을 털어내는 곳이다. 어떤 이는 ‘가능성을 검증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카페를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정다운 대표는 선반에 늘어선 컵을 집어 설명해준다. 정다운 대표가 집어든 컵은 일회용 플라스틱컵 크기다. 튼튼하고 예쁘게 생겼다, 이것이 첫 감상인데 자세히 보거나 정 대표의 설명을 따라가면 컵의 특별함이 드러난다.
에스케이(SK)케미칼 에코젠이라는 소재, 밑부분 튀어나온 곳이 컵을 잡으면 손을 표면에 닿지 않게 띄워주고 미끄러지지 않게 한다. 파랗거나 하얀 컵 뚜껑이 음료를 덮는다. “보온도 보냉도 안 돼요. 하지만 따뜻한 것도 차가운 것도 잡을 수 있어요. 컵 슬리브(컵을 싸는 것)가 없어도 되게 설계했죠. 슬리브가 있으면 뺐다 끼웠다 해야 해서 세척할 때 번거로워요. 고민을 많이 해서 만들었어요.” 고민의 이유는 세상 처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미 기존에 사용되는 텀블러를 모범 삼으면 쉽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플라스틱컵을 대용하는 다회용 컵이다. “밀폐나 보온 등 많은 기능을 담고 있지는 않아요. 어차피 일회용 컵도 밀폐가 되어 가방에 넣을 수 있지는 않잖아요. 고무 재질 등이 들어가면 세척이 번거로워지는 단점이 있어 단순하게 일회용 컵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정다운 대표는 이 컵을 디자인 등록해놓았다.
다회용 컵은 ‘보틀클럽’ 카페에서 사용된다. 보틀클럽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먹고 걸어다니다가 다 마시면 컵을 다른 보틀클럽 카페 어디든 반납할 수 있다. 단말기에 대여와 반납 처리가 공유된다. 서대문구 8군데, 은평구, 성북구의 카페가 보틀클럽에 가입했다. 콘퍼런스 등 행사 시 컵을 대여하는 서비스도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로 거의 행사가 열리지 않았다. 정다운 대표가 이 컵을 개발하고 시스템이 되기까지 몇 개의 평행우주가 운행하고 있다. 평행우주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가 필연이 아니라 ‘다행스러운 우연’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첫 번째 평행우주. 정다운 대표는 2017년 거의 6개월간 일회용 테이크아웃 컵의 버려진 이후를 따라가는 여행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재활용되는가라는 궁금증에서였다. 고급 의류 브랜드에서 재활용하는 상품을 광고하는 경우가 있다.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아웃도어, 가방 등. 플라스틱컵을 버렸더니 이렇게 예쁜 옷으로 태어났어요, 하는 이야기면 얼마나 좋을까.
정 대표의 쓰레기여행은 쓰레기차를 따라 선별장, 페트재활용공장, 믹스플레이크 제조공장으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확인한 것은 플라스틱컵이 많이 섞이지 말았으면 하고 용쓰는 재활용업체들이었다. 같은 재질이라도 페트병에 비해 재활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재활용되는 게 5% 정도로 추정되는데, 카페의 자발적 협약에 의해 전문 수거업체가 수거해가는 곳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쓰레기여행’ 동영상, 브런치 ‘불편한 생활의 실험’) 하지만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재활용 마크가 있다고 알아서 쓸모 있는 물건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재활용의 모든 과정, 재활용 뒤의 영향까지 모든 과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눈앞에서만 사라질 뿐 기나긴 쓰레기여행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쓰레기여행’ 동영상 내레이션 중)
보통 쓰레기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기업을 차리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이런 것에 까다로운 편이었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집안 분위기가 뭔가 쓸데없이 낭비되는 것을 싫어했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 가전 디자인팀에서 디자인을 했다. 시안을 낼 때가 되면 사무실에는 이면지가 넘쳐났다. 회사에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 ‘이면지 사용’에 관해 제안한 적이 있다. 제출용에 이면지를 사용하면 안 되니 프린터를 이면지와 새종이용으로 나눠 사용해보면 어떨까라는 제안이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잊혔지만 짠돌이는 여전히 정 대표의 마음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즈음 프리미엄 패키지가 유행했다. 제품만 벗기고 나면 버려지는 패키지를 디자인하다보니, 어떻게 잘 버려지게 할까, 고민하게 되더라.” 그래서 찾아보니 ‘그린디자인’이라는 전공이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디자인 대학원을 다녔다.
“그린디자인은 전 과정 개념이다. 폐기를 고려한 소재를 고르고 생산과정도 고민한다. 이렇게 해야 그린디자인이다, 라는 것을 딱 배웠다기보다는 디자이너의 역할과 책임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걸 어떻게 잘 팔리게 할까라는 구매 시점의 그래픽적 고민이 디자인의 다가 아니다. 그렇게 시야가 넓어졌다.”
정다운 대표가 생각난 듯 덧붙인다.
“아, 쓰레기여행 전에 보틀카페라고 팝업카페가 있었어요.”
대기업 디자인팀을 그만둔 뒤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스튜디오를 열었다(‘정다운을 바꾼 것’ 참조). “친구 중 한 명이 요리를 잘했는데 서울 홍익대 인근에 가게를 내볼 수 있을까 하고 묻더라고요. 저는 뭐든 친구들한테 한번 해봐, 이러는 사람인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더라고요.” 상수동에 있어보니 작게라도 가게를 운영한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를 알았다. 인테리어 다 해놓고 얼마 안 되어 망해 나가는 가게가 수두룩했다. “친구 말을 생각하다가 술집이 많은 상수동 골목을 걷는데 가게들이 모두 낮에 닫혀 있는 거예요. 밤에 여는 술집의 낮시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내놓았다. 친구에게 “해봐”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주말에는 안 쓰니까 공간을 써.” 지금은 낯설지 않은 ‘공유부엌’이라는 개념이다. 2014년이었다.
저녁에 열거나 주말에 열던 식당들이 입소문을 탔다. 요일별로 식당이 바뀌었고, 심야식당도 있었다. 지상파 TV 다큐 프로그램에까지 나온 뒤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점심때 자신이 하던 청첩장 스튜디오보다 더 잘됐다. 다큐를 보고 은퇴한 분이 찾아왔다. 자기도 취미로 하고 싶은데 어떠냐고 물었다. 그런 중에 자신도 오전 시간에 시도해본 팝업 스토어가 첫 번째 ‘일회용이 없고’ 두 번째 ‘공유 컵’을 사용하는 카페였다. ‘보틀카페’라는 이름의.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우주가 이곳으로 이동했다. 보틀팩토리와 함께 있는 채우장 역시 그의 이동한 우주에서 당연한 시도였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카페를 운영하는데 일상생활도 그런가요.
“그럼요. 제가 채우장을 시작한 것도 일상의 필요에 의해서예요.”
이전에 살던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에서는 주머니를 들고 가면 쌀도 살 수 있고 통을 가져가면 웬만한 것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동네 마트에도 가지와 토마토가 묶여 있고, 랩으로 칭칭 감겨 있어 “일상이 해결이 안 되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팝업으로 시작한 것이 채우장이다.
2019년 시작한 채우장은 ‘포장이 없는 시장’이다.
“채우장은 불편한 곳이에요. 지갑만 들고 오면 아무것도 못 사죠. 만약 수제잼이 맛있어 보여도 담을 용기가 없으면 못 사니까. 무엇을 파는지 미리 알고 용기를 준비해야 살 수 있는 곳이니까요.” 홍보를 시작했다. SNS에 채우장 판매 물품 목록과 함께 일회용 포장 없이 장을 봤을 때의 예쁜 이미지를 올렸다.
그리고 동네 가게 섭외를 시작했다. ‘경성참기름’ 가게에 말해서 깨와 깨소금 등을 덜어서 팔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용기를 가져오지 않으면 구매자도 구매자지만 판매자도 팔 수 없으니 잘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당시에는 참조할 만한 벤치마킹 사례가 없었다. 그런데 채우장 문을 열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자신감이 붙었다. 농부에게 판매자로 참여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방문한 농부 판매자는 종이봉투를 많이 준비해 왔다. 그에게 이용자가 담을 것을 가져올 테니 종이봉투를 미리 비치하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그가 물었다. “그게 가능하겠어?” 그는 끝나고 말했다. “그게 되네.”
“웬만한 회사는 고객에게 가장 빠르게, 가장 깨끗하게 줄 것만을 생각하죠. 하지만 모든 소비자가 그런 것을 바랄까요. 사실 소비자는 의외로 준비되어 있는데 기업들이 못 따라오는 것 같아요.”
이용자들은 채우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약속이 지켜지는 공간” “가능성을 검증하는 공간” “생각보다 소비자는 준비되어 있다”.
채우장 같은 것은 어디든 가능할까요.
“처음에 이 동네로 옮겨온 건 동네가 매력이 있어서였어요. 골목길을 사람들이 오가고, 놀다가는 공간이 있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참기름집과 문방구가 있고, 괜찮은 카페들도 있고, 안산과 홍제천이 있고 1인 거주자도 많아요.”
연희동 거리에 보틀팩토리를 열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왔다. 보틀팩토리는 동네를 여행하는 컵 사업이고, 채우장은 동네 주민이 오는 가게다. 동네는 소중하다.
“규모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인사하는 사이, 아는 가게니까 파는 거에 장난을 치지 않잖아요. 옆집 할머니 고추장이면 잘 먹을 수 있는데, 공장에서 만든 거면 해썹(HACCP) 인증이 필요한 거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물건이면 좋아서 소개할 수 있죠. 신뢰가 안전함의 울타리가 되는 거죠.”
2021년 봄 보틀팩토리에서는 첫 녹색 반상회가 열렸다. 녹색 반상회는 그가 적는 저널에 이름과 함께 개념을 적어둔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다. 동네 주민들이 모여 지역 안에서 발생한 쓰레기의 행방을 결정한다. “큰 단위까지는 할 순 없지만 동네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다운 대표는 플라스틱컵을 쫓는 쓰레기여행 이후 2019년 음식물쓰레기를 쫓는 여행도 했다. 마포구 집하차량을 따라 음식물쓰레기 집하장을 따라가보고는 기겁했다. 냄새 때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음 맞는 동네 주민과 스태프와 음식을 다듬으면서 나오는 생쓰레기를 썩혀서 비료로 만드는 실험을 했고, 얼마 전에 성과를 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커피 찌꺼기다. 커피 찌꺼기를 버섯 재배에 이용하는 방법이 있더라. 커피 찌꺼기를 수거해 마을에서 버섯을 키우고 채우장에서 판매하면 어떨까. 그런 마을기업이 생기면 좋겠다.”
그는 버려지는 쓰레기가 모두 재활용될 거라 믿어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분리배출 잘해서 버려도 모두 재활용되지 않아요. 깨끗하게 분리배출해서 버리면, 페트병이 페트병이 되는 줄 아는 사람도 있어요. 버려진 페트병은 재활용해도 차 바닥재나 충전솜이 됩니다.” ‘버린다’는 방법이 아니다. ‘버릴 것을 소비한다’ 역시 방법이 아니다.
“쓰레기여행 이후 바뀐 점은 재활용에 대한 맹신을 버린 거예요. 그래서 사회의 재활용에 대한 맹신을 바꾸고 싶어요. 해결책이라는 것을 바꾸고 싶어요.”
anyon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1355호 - 체인저스 21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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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해본 시간
월급을 따박따박 받던 회사를 나온 것은 여러 이유가 겹쳐 있었다. 몸이 아프기도 했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일을 일치시키고 싶었다. 다시 일하자 싶을 때 눈에 들어온 건 수작업을 많이 하는 작은 스튜디오 공방이었다. 들풀을 소재로 그림도 그리고 레터프레스도 하고, 주인장은 여유롭게 자신의 시간을 조절해가면서 예술활동을 하는,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것들”.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이베카라는 작은 스튜디오를 차렸다. 레터프레스를 하고 청첩장 디자인을 하고 자연염색을 했다. 물론 꽃 그림도 그렸다. 이런 생각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쿠바가 해외 물자 조달이 안 됐을 때 꽃집 등에서 지렁이부터 팔아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체계를 꾸렸다고 하더라. 그처럼 씨앗과 비료로 식물을 집에서 키워 먹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은 맨날 화분의 식물은 다 죽이는 편이다. “그런 것을 알려주는 컨설팅 숍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공방을 하면서 자신이 혼자 일하는 데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큰 조직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것도 맞지 않더라. 구속이 싫지만은 않구나, 하고 깨달았다.”
“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이다.
그리고 하나 더 얻었다. 정다운 대표는 말한다. “30대 동안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봐서 다른 거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다운 대표가 공들여 만든 보틀컵은 먼 지역 카페에서는 공유가 안 된다. 다회용 컵을 사용하고 싶은 카페에서 전화가 온다.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하면 ‘팔면’ 간단하지 않냐고 묻는다. 펀딩 업체도 컵을 개발했을 때부터 ‘판매’ 제안을 했다. 하지만 정 대표는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한다. “판매에 대해선 고민 중입니다.” 처음부터 공들여 만든 컵을 판매하는 것을 망설이는 게 경영인이 본다면 답답한 노릇이겠다.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다회용 컵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를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카카오임팩트에서는 이런 여러 사업을 하는 정 대표를 ‘소셜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다. 상품의 전 과정을 생산부터 폐기까지 고민하는 ‘디자이너’여서다. 여기서는 ‘공유의 가능성을 무한으로 열어젖힌 사람’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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