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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그 일은 학대 범죄입니다

등록 2020-11-21 11:09 수정 2020-11-22 01:23
1339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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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야구장 노예’라 이름 붙였던 지적장애인 신태원(62·가명)씨 이야기를 담은 제1312호에서 우리는 장애인 노동착취가 반복되는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장애인을 데려다놓고 경제적 이익을 챙겨도, 수사기관이 이를 범죄·인권침해가 아니라 단순 임금 체불 문제로 접근해 형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제1339호에선 장애인의 삶에 파고든 또 다른 범죄를 짚어봅니다. 우리 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지만 학대로 인식되지 않은 ‘사건들’입니다. 경북 구미에 사는 발달장애인 김진하(22·가명)씨는 출퇴근길에 만난 고교생 2명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줬습니다. 그들은 진하씨 개인정보를 알아내 휴대전화 결제로 물품을 사고는 이를 싼값으로 되파는 ‘소액결제 깡’을 했습니다. 그런 뒤 자신들의 전화번호와 통화기록을 모두 지웠습니다. 진하씨 통장에서 휴대전화 소액결제 120만원이 빠져나간 뒤에야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2016년 7월 부산의 한 이동통신사 대리점은 지적장애인 ㄱ(28)씨에게 휴대전화 9대, 태플릿피시 2대, 인터넷, 인터넷티브이(IPTV) 서비스 계약을 맺도록 했습니다. 또 다른 지적장애인 ㄴ(22)씨도 3개월간 휴대전화 5대, 인터넷, 인터넷티브이 서비스에 가입합니다. 비장애인이라면 호객 행위에 이끌려 휴대전화를 하나 샀더라도 그 뒤 계속 개통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대리점 직원은 장애 취약성을 악용해 학대를 저질렀습니다.

장애인 학대 예방과 피해자 지원을 위해 설립된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2017∼2019년 3년간 19살 이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형사 판결문 1210건을 전수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휴대전화를 개통하게 해서 싼값 혹은 대가도 없이 넘겨받거나 피해자 명의로 대출받아 돈을 가로채는 범죄가 여럿 드러났습니다. 경제적 착취 범죄(120건) 피고인 148명 가운데 60명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관대했습니다. 여러 장애인을 겁먹게 한 뒤 휴대전화를 강제로 개통시킨 피고인에게, 2018년 대구지방법원은 “피해자가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일부 금액만 교부받은 점에 비춰 나름대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며 형량을 낮췄습니다.

얼떨결에 범죄 대상이 돼버리는 장애인은 어떤 마음일까요.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류승연 작가는 “무기력해진다”고 말합니다. 타인의 지원이 자기 생존에 얼마나 절실한지 잘 알기에 장애인은 학대당해도, 부당한 요구를 받아도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류 작가는 “사랑받으려는 순수한 욕구를 이용했기에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학대는 죄질이 더 나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적장애인이 학대 피해를 구제받을 길은 멀고 험합니다. 형법으로 처벌할 수는 있지만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고 피해 보상도 민사소송을 내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를 깨닫기도, 알았다 해도 경찰에 신고하기도, 신고했다고 해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도 힘든 지적장애인을 겨냥한 학대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이유입니다. ‘저지르고도 모르는 죄’를 끊어낼 길은 그것이 장애인 학대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제대로 인식하는 겁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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