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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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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비극

등록 2020-02-09 03:28 수정 2020-05-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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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봄, 노동건강연대의 박혜영 노무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 노무사는 이 바닥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산업재해 전문 활동가’입니다. 그런 그가 한번 보자고 하기에 서울 동작구의 한 카페로 갔더니, 웬일인지 발목에 석고붕대를 하고 나타났습니다.

“출장 갔다가 다쳤어요. 이거 산재잖아. 나도 나름 노무사고. 근데 산재 신청이 너무 귀찮아서 못해먹겠더라고요.”

산업재해 전문가가 산재를 당한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산재 신청의 문턱은 높았습니다. 다친 다리를 이끌고 병원을 찾아 여러 의료기록을 받고, 근로복지공단에서 요구하는 문서들을 내야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냥 건강보험이랑 실비보험으로 처리할까 싶은 걸 내가 꾹 참고 있어요. 산재보험은 너무 이용하기 어려운 제도예요. 직접 당해보니 더 세세하게 보이더라고.”

산재 전문가가 이 정도면 일반 노동자는 오죽할까요. 당장 생계비와 치료비를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사람만 산재로 신청하지, 웬만한 부상이나 질병은 그냥 묻고 넘어가게 될 겁니다. 이러니 5년7개월간 2만1896명이 289억3288만원의 진료비를 산재보험 대신 건강보험으로 청구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어쨌든 이날 박 노무사가 만나자고 한 용건은 ‘2019 산재보상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지원사업’에 참여해 기획 기사를 만들어달라는 거였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하고 노동건강연대가 실무를 맡은 이 사업은, 빈곤에 빠진 산재 노동자에게 생계비와 법률서비스를 지원하고 산재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박 노무사의 부상 투혼에 아이러니함을 느끼며 기획에 합류했습니다. 4월부터 8월까지 매달 한 차례씩 노동건강연대 사무실에서 지원 심사가 열렸습니다. 예산이 정해져 있는지라 가장 지원이 급한 산재 노동자를 선정해야 했습니다. 의사와 노무사, 노동조합 활동가 등이 모여 매달 3시간 넘게 토의했습니다. 저는 옆에서 지켜보며 ‘하아…’ 한숨만 쉬어댔습니다. 어느 한 분 안타깝지 않은 사연이 없었거든요.

산재 기사는 사실 쓰기 어렵습니다. 워낙 많은 노동자가 끔찍하게 죽기 때문에 웬만한 비극은 평범해 보입니다. 산재 기사를 쓸 때마다 ‘불행을 전시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늘 유혹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리 쓰면 산재가 ‘누군가의 특별한 이야기’가 되고 말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산재의 평범함과 보편성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누구든 겪을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이 겪고, 이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당신도 겪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통계와 자료에 의존했고 정우준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의 도움을 받아 제1285호 노인 산재 기획(‘늙었다 일한다 다친다 가난하다’)과 제1298호 산재 은폐 기획(‘사실은 우리도 아팠다’)을 완성했습니다.

아름다운재단과 노동건강연대의 ‘산재보상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지원사업’은 올해도 진행됩니다. 이 사업이 산재의 사각지대를 구석구석 찾아내길 기대합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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