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4월11일.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정당들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막판 사력을 다했다. 권력을 쥔 신한국당은 김영삼 정부의 임기 말 개혁 작업의 완수를 위해 ‘안정 과반수 확보’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야당인 국민회의는 정권의 오만과 독선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외쳤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보수 세력 결집과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이하 3만달러) 시대를 열기 위한 투표를 부탁했다.
3만달러 신화는 그렇게 선거와 맞물려 탄생했다. 1만달러를 갓 넘긴 시절, 한국 경제의 ‘제2의 도약’을 상징하는 정치적 구호로 쓰였다. 자민련은 당시 15대 총선 공약 88개 항목에 3만달러를 포함했다. ‘제1의 도약’으로 여길 법한 ‘한강의 기적’을 일군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으로선 뜬금없는 구호는 아니었다.
이듬해 자민련과 연합한 국민회의 김대중 대선 후보는 3만달러를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승격시켰다. 목표 달성 시점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세계 5대 경제대국 입성과 함께. 노무현 대선 후보는 높은 성장률을 제시하긴 했지만 3만달러란 숫자가 주는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다. 제대로 장사한 건 이명박 대선 후보였다. 비행기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747’ 공약은 유행어가 되었다. 해마다 경제가 7%씩 성장해 4만달러를 달성해 세계 7위 경제대국을 이루겠다는 포부였지만, 역시 공갈빵이었다.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차에 747을 흉내낸 ‘474’ 구상을 내놨다. 자원을 잘 동원해 경제가 부작용 없이 이룰 수 있는 잠재성장률을 4%로 끌어올리고 고용률 또한 70%까지 높여 4만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청사진이었다.
거짓 신화는 마침내 지난해 실현됐다. 정치적 구호가 된 지 22년 만이다. 그사이 분명 경제가 성장해 사람들의 소득이 늘어난 게 사실이지만, 현혹했던 수치의 화려함에 비하면 현실은 빈약하다. 선진국 문턱으로 여기며 그토록 목맨 3만달러를 이뤘지만 지금 제2의 도약대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3만달러의 착시 효과는 분배에서 드러난다. 착시엔 평균의 함정이 있다. ‘1인당’은 평균을 뜻한다. 소득이 0원인 사람부터 1조원이 넘는 사람까지 다양할 텐데,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균등하게 3만달러를 버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소득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소수 부자의 소득이 급증해 1인당 평균값을 끌어올릴 수 있다. 소득을 기준으로 줄 세웠을 때 상위 10%에 있는 사람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6년 35%에서 2016년 43%로 늘었다(‘세계 불평등 데이터베이스’). 같은 기간 국민소득은 1만3077달러에서 2만7681달러로 늘었다. 1인당 평균값의 상승 속에 소득의 집중, 즉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숨어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국민총소득을 인구수로 나눈 값인데, 국민총소득에는 가계소득만이 아니라 기업소득이 포함돼 있다. 가계소득은 쪼그라들었는데도 기업소득이 크게 늘었을 때 1인당 국민소득은 늘어날 수 있다. 국민총소득에서 기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13.9%에서 2016년 24.5%로 2배쯤 늘었다. 경제 규모가 커지는 동안 상대적으로 가계보다 기업의 소득이 더 빠르게 증가했다는 뜻이다. 경제활동으로 부가가치가 늘어날 때 임금을 주요한 소득원으로 하는 가계보다 기업에 더 큰 몫이 돌아간 탓이 크다.
3만달러 신화는 성장을 앞세우면서 오랫동안 분배를 후순위로 미루거나, 소득재분배 등에 써야 할 나랏돈의 투입을 제약해왔다. 그새 개인 간, 개인과 기업 간, 기업과 기업 간, 노동자 간, 지역 간 격차는 이제 성장동력을 갉아먹을 정도로 악화됐다. 그런데도 3만달러를 달성하자마자 다시 4만달러, 5만달러 시대를 외친다. 온갖 성장의 비법과 공식, 훈계가 판친다.
오래 속았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도 더는 속아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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