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엠에프’란 고유명사로 기억되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 위기는 외채 탓이었다. 나라끼리 거래할 때 주고받는 달러가 바닥나 빚어진 일이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아이엠에프 하면 언뜻 떠오르는 건 나랏돈 지출을 줄이는 긴축재정과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노동유연화, 비싼 이자를 물게 하는 고금리 처방들이다. 저승사자였던 국제통화기금의 주문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빚을 빨리 갚아야 한다는 이유로 씀씀이를 크게 줄였다. 그때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건 ‘잘못된 처방전’ 탓이 컸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국제통화기금은 각국에 세금을 깎아주기보다 나랏돈을 풀어 경제위기에 대처하라고 권고했다. 외환위기 때 처방을 기억하는 기자는 당시 ‘이례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기사를 썼다. 국내외 많은 매체도 그렇게 짚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달라진 주문을 거부해도 됐지만 기꺼이 따랐다. 시장은 빚을 줄이려 돈을 움켜쥐었지만, 정부가 나서서 돈을 왕창 풀었다. 확장적 재정으로 경기를 띄우려 부지런히 풀무질했다. 그렇게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다시 10여 년이 흘렀다. 경제가 좋지 않다. 지난 3월 국제통화기금은 우리 정부에 이미 편성된 예산 말고 9조원가량을 추가로 풀어야 그나마 목표로 하는 경제성장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잔상이 너무 커서인지 재정 확대를 권하는 국제통화기금이 아직도 낯설다. 나랏돈을 더 풀어서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라는 국제통화기금을 보면서, 나라 살림을 놓고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수상한 풍경들이 자꾸 떠오른다.
# 진단 따로 처방 따로. 최저임금 인상을 포함한 소득주도성장이 경제를 망가뜨렸다고 진단하는 사람이 많다. 정작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재정 투입엔 딴죽걸기 일쑤다. 올해 예산과 추가경정예산(추경)을 ‘재정 살포’ ‘대책 없는 돈 풀기’ 등으로 헐뜯는다. 일단 반대하고 어떻게든 규모라도 줄이려 애쓴다. 잘못된 처방전으로 확인된 감세나 뜬금없는 규제 완화를 슬쩍 내밀지만 자신들도 얼마나 납득할지 모르겠다.
# 과한 나랏빚 걱정. 우리 정부의 빚은 주요국에 비춰 아주 낮다. 부채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나랏빚이 국내총생산(GDP)에 견줘 몇%나 되는지 비교하는데, 우리나라는 약 40%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그런데도 ‘나랏빚 눈덩이’ ‘국가부채 사상 최대’ 등 자극적 언어로 불안감 퍼뜨리기를 계속한다. 기실 빚이야 적을수록 좋겠지만, 돈을 써야 할 때 못 쓰면 더 큰 경제 재난을 맞을 수 있다. 물론 펑펑 쓰자 했다고 곡해하지는 마시길.
# 상습적 과소 세수 추계. 가계도 마찬가지이지만 정부도 수입에 맞춰 지출 계획을 짠다. 수입은 주로 세금이다. 지난 3년만 봐도 한두 푼이 아니라 매년 20조~26조원의 세금이 추정치보다 더 걷혔다. 그만큼 애초 쓸 돈을 적게 잡는 데 지속해서 영향을 끼쳤다. 경기가 예상보다 좋아서 세수가 초과된 게 아니다. 홍순탁 회계사의 지적처럼 나라 살림 계획을 짜는 기획재정부의 세수 추계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의도된 실수로 볼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추경 규모가 7조원이 넘지 않을 것이라며 국제통화기금의 조언에 다소 보수적으로 반응했다. 정부가 경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대응책은 확장적 재정 정책이다. 나랏돈을 풀어 돈줄이 마른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돈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 취약계층 지원에, 도로나 교량 등을 짓는 데, 위태위태한 기업 지원 등에 그 쓰임새가 많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을 반 토막 낸 건 경제 탓이 크다. 그런데 추경만을 놓고 보면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약해 보인다. 의지란 주관적 영역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지만, 오랫동안 긴축재정의 전도사였던 국제통화기금의 제안보다 더 적다는 게 자꾸 신경 쓰인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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