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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해지겠습니다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3-19 11:20 수정 2020-05-03 04:29

김밥을 팔아 모은 전 재산 51억원을 대학에 기증한 김밥 할머니, 400억원을 대학에 내놓은 청과상 노부부, 행상으로 번 1억원을 상아탑에 쾌척한 할머니…. 못 입고 못 먹고 못 즐기면서 아끼고 또 아낀 돈을 대학에 선뜻 내놓는 미담 기사를 볼 때마다 불경한 생각을 해왔다. 아니 돈이 넘쳐 수천억원씩을 쌓아놓고 신식 건물 짓는 데 부지런히 돈 뿌리는 대학에 왜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을 기부하지? 배우지 못한 한을 풀려 기부한다는 노인의 선한 뜻을 너무 잘 알면서도, 미래를 짊어질 인재 양성에 투자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내 딴엔 좀더 좋은 일에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한 사회의 수준을 언론을 통해 가늠할 수도 있을 텐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좋은 언론을 세우거나 유지하는 데 기부하면 안 될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감히 그게 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는 만큼 자신감은 약해졌다.

허망한 상상은 로또로도 이어졌다. 1등 당첨금을 어떻게 쓸까 생각할 때마다 돈을 먼저 가족들과 나눈 뒤 일부는 에 기부하겠다는 계획을 짰다. 어쩌면 소속된 언론사가 튼튼하면 결국 그 콩고물이 기자에게도 떨어지니 그런 생각조차 이기적이거나 내부자로서는 너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김밥집 할머니와 로또가 아닌 내 현실은 인색하기 짝이 없다. 휴직과 연수 등으로 소득이 줄 때마다 기부를 끊거나 금액을 조금씩 줄여 지금은 서너 곳 기부에 그친다. 이런 내가 먼저 후원제를 외칠 수 있을지, 의 가치에 투자해달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자신이 없었다.

“후원금 제도 도입은 어떨까?” 지난해 11월25일 먼저 후원제를 권하는 독자 ㄱ씨의 전자우편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감은 채워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제1240호 ‘만리재에서’(뻔뻔해질 수 있을까)를 쓸 수 있었던 것도, “더는 머뭇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마음을 다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응원이 컸다. 언제 할까 망설이던 차에 후원 의사를 밝힌 10여 통의 설 퀴즈큰잔치 응모엽서는 일을 저지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비판적인 애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조용한 독자다. 다운 모습, 기대하고 믿는다. 후원금 시스템 도입, 적극 찬성한다.”(서울 홍아무개씨) “을 받아볼 때마다… 발행되고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누군가 말한 후원금 도입을 진행하라.”(대구 권아무개씨) “광고에 얽매이지 않고 쓰고 싶은 기사를 마음껏 쓸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린피스처럼 개인 후원금만으로도 꾸려나갈 수 있길 바란다.”(강원도 원주 장아무개씨) “독립성 유지하기 위한 기부금제 운영을 지지한다.”(서울 백아무개씨)

현물을 후원하겠다거나 구독료 인상을 지지한다는 독자들도 있었다. 후원제를 하겠다고 선언하기 전 독자들에게서 받은 엽서라 더욱 의미가 컸다. 그 가운데 경북 영천에서 치과의사를 하는 곽성순씨와 충남 공주에서 딸기농장을 하는 공경숙씨를 이번호 표지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모셨다.

진성 독자 70여 명이 들어와 거의 날마다 편집장과 대화하는 ‘독편3.0’ 카카오톡 단톡방에서도 이은주씨와 꿈뚱뚱이가 즉석에서 동참 의사를 밝혔고, 다른 분들도 응원해줬다.

이제 독자에게서 힘을 받아 창간 25주년 특대3호(제1254호)에서 후원제 시행을 공식화한다. 드디어 행동에 나선다. “조금 더 뻔뻔해지기를 부탁드린다”는 ㄱ독자의 전자우편에, 정말로 뻔뻔해지기로 작정했다.

첫발을 뗀다. 후원의 많고 적음을 성패의 가늠자로 삼지 않겠다. 갈 수밖에 없는 길이기에 멀리 내다보며 간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진정으로 좋은 기사, 좋은 언론으로 보답하고 싶다. 앞으로 의 주인은 독자와 후원자라는 사실이 더욱 실감날 게다. 지구에서 떠날 때까지 을 계속 보겠다는 어느 독자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후원으로 충전해 이 지구보다 먼저 방전되지 않도록 하겠다.

*왜 후원제를 하는지 진명선 기자와 한 인터뷰(이번호 28~31쪽)에서 자세히 밝혔다.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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