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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토크

등록 2018-12-01 16:42 수정 2020-05-03 04:29

그 후로 오랫동안

아버지의 고향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수도권에 자리잡은 뒤 건설됐다. 1년에 한두 번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 마을에 내려간다. 원전에서 10㎞ 이상 떨어진 마을이지만 동네 어르신들 집에는 한국수력원자력이 주최하거나 후원한 행사 등에서 받아온 기념품이 곳곳에 있다. 동네 중고생들은 장학금을 받고 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부산 기장군 고리 원전 1호기 정전 은폐 사건이 벌어진 2012년, 각종 원전 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사건이 터진 2012~2013년 시골에 가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에서 원전 운영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를 출입하며 원전 안전 문제를 기사화하느라 꽤 애먹고 있었다. 원전 안전을 우려하는 여론이 커지고 있었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불안하긴 하지. 그래도 원전이 좋은 일 많이 한다”고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한편 취재를 다녀보면 원전 5㎞ 이내 인접 지역 주민들은 “차라리 서울에 원전을 지으라”며 원전 안전 대책이나 이주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원전을 두고 엇갈리는 복잡한 시선들을 짚어보고 싶었지만 연이어 터지던 원전 안전 문제를 따라가느라 잊었다.

잊고 있던 숙제가 떠오른 건 경북 경주 양남면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뒤 벌어지는 논란 때문이었다. 경주시는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로 세수 440여억원이 줄어들고 고용불안이 벌어질 것이라고 반발했다. 주민들은 같은 마을이라도 “안전이 우선”이라는 이들과 “원전 지원금 감소는 안 된다”는 이들로 갈렸다. 월성 원전은 곧 포화상태(2021년)에 이르는 사용후핵연료(고준위 핵폐기물) 처리 문제로도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여론은 이 복잡한 문제를 ‘탈원전 대 친원전’ 틀로만 재단하고 있다. 정작 던져야 할 질문들을 우리 사회가 자꾸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계수명이 있는 원전은 고리·월성 1호기처럼 언젠가는 가동을 멈추고 폐로해야 한다. ‘국책사업이라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원전을 떠안은 인접 지역 주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폐로와 핵폐기물 처리는 어떻게 되나’ ‘원전 지원금에 종속된 지역경제는 어떻게 되나’ 등의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제1239호 표지이야기로 이어지게 됐다. 실제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 주변에서 만난 이들은 “우리한테 탈원전, 친원전 딱지를 붙이지 마라”는 말부터 시작했다. 미우나 고우나 원전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이들은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를 최우선에 두고 있었다. 그 중심에 매년 1조원 넘게 내려가는 원전 지원금이 있었다. 원전 지원금은 정부와 한수원에는 ‘발전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지역주민들의 반발과 박탈감을 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다. 주민들에겐 끊을 수 없는 ‘설탕’이었다.

최근 대만이 국민투표로 탈원전 정책이 담긴 법조항 폐지를 결정하며 다시 탈원전이냐 친원전이냐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어쩌면 원전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이런 논란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정부의 에너지전환 정책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원전 제로’는 2083년에 이뤄진다. 누군가는 ‘위험시설’을 계속 떠안고 살아야 한다. 이 역시 “저렴하고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원전의 ‘숨겨진 비용’의 하나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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