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은 성공이었을까요, 실패였을까요?
남북이 활발히 대화해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나아가 평화통일의 실마리를 찾기 원하는 한국 진보 진영에 이것은 피해갈 수 없는 질문입니다. 개인적으로 햇볕정책은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결국 실패한 정책’이라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은 위대한 도전이었고, 이 노선이 끝까지 유지됐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는 지금과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햇볕정책이 실패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혹은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탓은 아닙니다. 6·15 공동선언을 파멸로 몰고 간 것은 2001년에 터진 미국의 9·11 참사였습니다. 9·11이라는 끔찍한 참사를 겪은 미 네오콘들은 북한 등 이른바 ‘불량국가’들을 대상으로 강경한 대외정책을 펴나갑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연두교서에서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이라 선언했고, 2003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방북을 계기로 제1차 북핵 위기를 봉합했던 ‘제네바 합의’를 사실상 해체하고 맙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북한은 여섯 번이나 핵실험을 감행했고, 지난해 11월엔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5형을 쏘아올렸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뒤늦게 6자회담을 시작했지만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했고, 뒤이은 버락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는 결국 전략 없는 시간낭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전쟁과 협상의 역사를 돌아보면, 협상으로 상대국의 의사를 변경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국가 간 협상이 타결되려면 협상국들 사이에 ‘이익의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내가 협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내줘야 하는 것 사이에 균형이 이뤄지지 않으면 협상은 되지 않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정부 간 12·28 합의가 결국 파탄난 것도 이익의 균형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이익의 균형과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이익의 균형이 다르니, 그 지점에서 다시 분쟁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협상의 반대말은 뭘까요. 전쟁입니다. 이번호에 나온 신간 <font color="#C21A1A"></font>의 저자 가토 요코 도쿄대 교수는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말을 빌려 전쟁을 “상대국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본 원리가 되는 헌법을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전쟁은 상대 국가의 헌법을 부정하고 이를 자국의 의사에 따라 바꾸려는 행위입니다. 전쟁 전 일본 헌법 제1조가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에서, 전쟁 후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중략) 그 지위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반한다”로 바뀐 것을 떠올려봅시다.
북한은 2012년 5월 개정한 헌법 전문에 “김정일 동지께서는 (중략) 우리 조국을 불패의 정치사상강국,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시였다”는 내용을 넣었습니다. 헌법상 북한은 이미 핵보유국입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려는 한국과 미국 등이 북한에 하려는 것은 우리의 국가 이익에 맞게 북한의 헌법을 변경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협상을 통해선 좀처럼 이뤄내기 힘든 과제입니다.
살얼음판 같던 한반도 정세에 오랜만에 훈풍이 붑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1월1일 신년사에서 평창겨울올림픽에 “대표단 파견”을 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후 판문점의 남북 통신선이 복원됐고, 머잖아 고위급 회담이 열립니다. 초조해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남과 북, 그리고 주변국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익의 균형’을 찾아가는 머나먼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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