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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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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영수증

등록 2017-11-07 13:52 수정 2020-05-03 04:28

저희는 2013년 10월2일 (주)LG가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이하 공학연)이라는 우파단체에 ‘전시 협찬금’ 명목으로 1억원을 지급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수증을 저희에게 건네준 인사를 통해 LG가 자금을 지원할 때, 단체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획했던 전시가 망해 돈이 급해진 이희범 공학연 사무총장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의견을 조율하자, LG 쪽에서 “어떻게 전시 협찬금을 보낼까요”라고 연락해왔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LG라는 대기업을 움직여 1억원을 주게 만든 ‘보이지 않는 힘’의 명확한 실체까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 밖에 저희가 알면서도 쓰지 못한 내용들이 많은데, 다음 기회를 기약합니다.

자금 지원이 이뤄진 시점이 2013년 10월이니, 이 지원은 이명박 정부가 아닌 박근혜 정부 때 이뤄진 것입니다. 저희에게 증언해준 관계자에 따르면, LG를 움직인 실체는 최홍재·허현준(LG가 돈을 줄 시기에 허씨는 청와대에 없었습니다) 등 청와대 행정관들로 추정되며, 이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이 손발 노릇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검찰 주변에서 흘러나온 얘기와 맞춰봐도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8년 전 기억이 떠오릅니다. 보수 성향 시민단체를 대표하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중심이 돼 2009년 2월2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이명박 정부 출범 1년 기념 토론회’ 행사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임헌조 뉴라이트전국연합 사무처장이 내뱉은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보수정권이 탄생했는데도 여전히 궁벽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보수·우익단체의 서러움을 담아 “SK, 포스코, 롯데 등은 (지난 정권 때) 좌파단체 쪽에 수십억원에서 100억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했고, 한국전력·석유공사·토지공사·가스공사 등 공기업들은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을 지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 기업은 지난해 보수우파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공동 후원 행사에 단 1원도 지원하지 않았다”며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당시 회견장에서 이 말을 듣던 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 해도, 백주 대낮에 기업들을 향해 ‘돈 달라’는 협박을 하다니요.

지난 10월23일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 산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는 흥미로운 보도자료를 발표합니다. 이 자료를 보니, 당시 임 사무처장의 피 끓는 울먹임이 청와대의 심금을 건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현진권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실 시민사회비서관(자유경제원 원장)이 국정원에 ‘좌파의 국정방해와 종북책동에 맞서 싸울 대항마로 보수단체 역할 강화’를 위한 육성 방안을 만들 것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이 요청에 따라 국정원은 ‘배고파 못 살겠다’는 보수·우익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떡고물’을 지급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합니다. 즉, 대기업과 보수단체를 짝지어주고(매칭), 기부금과 광고 등을 제공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이후에도 이런 ‘검은’ 관행은 계속됐을 것입니다. 국정교과서에 찬성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추방해야 한다는 단체들이 전화를 걸고 팩스를 보내면, 기업들은 ‘돈은 어떻게 보낼까요’라고 물으며 화답했습니다. 언론은 감시에 실패했고, 우리 손엔 영수증 한 장이 남았습니다. 흔들리지 않은 한 장의 문서가 지난 9년 동안 이 나라가 겪어야 했던 치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 표지를 올립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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