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만 그만 그만 그만

등록 2016-11-22 17:44 수정 2020-05-03 04:28

피곤한 얼굴의 평범한 시민들이 하루의 마지막 힘을 모아 왁자지껄 떠드는 선술집에서 기자들도 소주를 마셨다. 요즘 관심사가 술상에 올랐다. 어느 기자는 한국 사이비 종교의 계보를 줄줄 읊었다. 다른 기자는 주사제로 쓰이는 약품들을 섞으면 향정신성 약물의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설명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청와대·국민연금·삼성의 연결고리에 파묻혀 있었다. 요즘 우리가 치르는 일이 대략 이러하다. ‘박근혜 게이트학’을 연구하느라 죽을 맛이다.

대학 입학 규정, 겨울올림픽, 문화산업 등은 입문 격이다. 대통령 연설, 해외순방, 정경유착 등은 핵심 과목이다. 이후엔 헌법을 거쳐, 청문회·국정조사·특검·탄핵을 연구해야 한다. 정신분석학·종교학·의학도 들여다봐야 한다. ‘박근혜 게이트학’을 언제 마스터할지 기약이 없다. 가히 십장생이 염병할 일이다. 욕지기 치미는 열공 가운데 우리는 알아차렸다. ‘박근혜 게이트학’ 완전 정복을 위해선 ‘박정희 개발독재학’을 파야 한다는 것을.

정유라는 어떻게 대학에 입학했는가. 대통령 비밀측근인 최순실의 자녀였기 때문이다. 최순실은 어떻게 비밀측근이 됐는가. 전직 대통령 박정희의 비밀측근인 최태민의 자녀였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어떻게 최순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를 위해 재벌·청와대·국가정보원·검찰·새누리당을 동원했는가. 전직 대통령 박정희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밀실독재 통치술을 그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밀실독재자에게 기업은 협박·공갈의 상대이자 이익 배분의 파트너고, 국민은 계몽·선전·조작의 대상 또는 감시·검열·처벌·탄압의 희생양이다. 그에게 의회는 들러리고 정부 각료는 허수아비이며 정보기관과 검경은 충직한 개다. 오직 한두 명의 비선 측근한테만 의견을 듣는데, 그 측근은 호가호위하며 호의호식한다. 그 통치술 그대로 박근혜 정권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정확한 재현인 것이다.

박정희 체제가 재현됐다는 비극과 그것이 파탄나고 있다는 희극 사이에 시민의 희비극이 있다. 한국의 시민은 광장에서 숱하게 저항했고, 몇 차례 승리했으며, 대통령을 퇴진시킨 적도 있지만, ‘박정희 패러다임 퇴진 투쟁’에서 진정으로 승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 대통령 뒤에는 거대한 패러다임이 있다. 그것은 50년 묵은 것이다. 그래서 이리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버티는 것이다. 하여 아직 갈 길이 멀고, 지혜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머리도 복잡해졌다. 박근혜 게이트학을 넘어 박정희 개발독재학을 정복한 뒤, 진정한 민주주의 입론을 연구해야 한다. 그 연구의 결과를 ‘사실의 발굴과 진실의 규명’이 담긴 기사로 내놓아야 한다. 이번호는 ‘세월호 7시간’에 집중했다. 그 시간에 무엇을 했건 안 했건,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패러다임의 시대착오적 재현을 도모하다 파국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7시간이 파국의 절정 또는 전형일 수 있다고 우리는 의심한다.

최선을 다했으나 부족하다. 계속 추적하겠다. 제보·의견·도움을 기다린다. 그것이 촛불의 연료가 될 것이라 믿는다. 저무는 것의 끝장을 지켜보고, 떠오르는 것의 빛나는 시작을 밝힐 촛불이 그제야 이 겨울을 버틸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촛불과 함께 외치며, 이 십장생 같은 공부를 더 치르며, 우리도 버틸 것이다. 그러니 그만, 그만, 그만, 이제 그만.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