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밤을 견디는 나무처럼 입 다물었던 사람들이 말한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 이제 그만.
“따라서 나는 내일 정오에 대통령직을 그만둔다.” 1974년 8월8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말했다.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오방낭의 조화처럼 다섯 가지 신묘한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 민주당 대선본부에 도청장치가 설치됐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신속·철저하게 수사했다. 닉슨 대통령 치하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넉 달 만에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닉슨의 재선을 위해 벌어진 대규모 스파이 작전이었다.” 한국의 검찰과 경찰은 대통령 눈치 안 보고 수사할 수 있는가.
최초 재판을 맡은 판사는 닉슨의 재선 성공 직후, 용의자들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빠져나갈 구멍을 기대하지 말고 배후를 실토하라는 엄벌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을 두려워않는 법률가는 백악관에도 있었다. 법무부 장관과 차관은 닉슨의 특별검사 해임 요구를 거부하고 사임했다. 율사 출신으로 대통령을 보좌하는 우병우와 황교안, 그리고 이 나라 판사들도 정의와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가.
미국 상원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청문회를 열었다. 이 자리를 통해 대통령이 수사를 방해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났다. 공화당 의원들조차 탄핵을 찬성했다. 탄핵 사유는 사법 방해, 권력 남용, 의회 모욕이었다. 수사를 방해하고 권력을 남용하며 의회를 모욕하고도 빳빳이 고개 쳐든 대통령이 있다면,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취재를 시작했고, 대다수 미국 언론이 뒤따랐다. 관련 보도는 2년여간 계속됐다. 주요 방송사는 5개월 동안 이어진 청문회를 전국에 생중계했다. 한국 언론은 지면과 전파를 아낌없이 할애할 수 있는가. 끓다가 식어버리는 냄비의 운명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닉슨은 물러났으나, 결심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해야 한다. 몇 달 동안 백악관과 의회의 시간·노력은 나를 변호하는데 소모됐다. 우리의 힘은 세계적 평화와 내부의 번영을 위한 문제에 집중돼야 한다. 따라서 나는 내일 정오에 대통령직을 그만둔다.” 정치의 에너지는 나라의 이익을 지키는 데 쓰여야 한다. 대통령이 그 걸림돌이라면 물러나야 한다. 대통령은 오직 국익에 헌신해야 한다. 그 원칙을 수용하는 최소한의 염치가 한국의 대통령에게 있는가.
40년 전 미국의 백악관, 검경, 법원, 의회, 언론 등에 산재했던 정의와 양심이 오늘의 한국에는 희귀하다. 와 이 미국 언론 못지않은 결기로 추적보도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희망은 있는가.
한국의 시민들은 계엄령과 발포와 수많은 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섰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26일 하야했다. 한국에는 민주·공화주의 시스템이 없었으나 시민 저항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닉슨은 양심적 엘리트에 의해 축출됐고, 이승만은 정의를 바라는 필부들에게 밀려났다. 그제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싹을 틔웠다.
싹이 자라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룰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제 모두 불탔다. 그러니 이제 그만, 잿더미의 국가 아래서 숨이 막히니, 제발 그만, 불통과 회피와 협박과 그 뒤에 쪼그려앉아 방울 흔드는 무속의 도발은 제발 그만, 이라고 누군가 외쳐야 한다. 들리는가. 외치는 이, 당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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