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템 노트’라고 이름 붙여둔 문서 파일이 나의 노트북 귀퉁이에 있다. 수십 쪽에 이른다. 짐짓 뾰족한 글자에 허무맹랑한 구상을 담았다. 중뿔나게 아이디어가 반짝였던 게 아니다. 남들이 준비한 더 좋은 기사에 나의 부잡스런 기사가 밀려난 적이 많았다. 그 흔적을 적어뒀다.
편집장 된 지 딱 6개월 지났다. 쓰고 싶은 것을 여전히 잘 쓰지 못하겠다. 다만 세월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은 게, 조각진 것이나마 깨달음 같은 것이 드물게 찾아온다. 이번 가을 서늘하게 찾아든 생각 하나. 기자 노릇은 쓰고 싶은 것과 써야 할 것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일이다. 쓰고 싶은 것과 써야 할 것을 각각 잡아채 씨름 붙여두고 심판 보는 일이다.
불행한 기자는 쓰고 싶은 게 없는 기자고, 평범한 기자는 데스크가 쓰라는 기사를 써내는 기자다. 유능한 기자는 독자가 원하는 것을 쓰는 기자이며, 훌륭한 기자는 독자에게 알려야 할 것을 쓰는 기자다. 정말 탁월한 기자라면, 독자가 원하는 것 가운데 반드시 알려야 할 것을 솎아내 자신이 쓰고 싶은 것과 연결시키는 기자일 것이다. 여기서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어떤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에게 무엇을 알려야 좋은지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그리고 한국의 기성언론은 그 대목에 대체로 무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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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켜켜이 쌓여가는 저 아이템 노트는 ‘써야 할 것’과 괴리된 ‘쓰고 싶은 것’의 잔해다. 쓰고 싶은 건 많았으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죽만 쑤었던 날의 퇴적이다.
언론학의 할아버지로 불리는 해럴드 라스웰이라는 학자가 있다. 그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제안했다. 모름지기 언론 연구는 5가지 질문만 따라가면 된다고 했다. 누가(Who), 누구에게(To Whom), 어떤 방법으로(In Which Channel), 무엇을 전달했는데(Says What),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With What Effect) 살펴보라고 했다. 60여 년 전의 지침은 오늘날 한국 기자들에게 오히려 새롭다. 우리는 누구인가. 누구를 향해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보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그것은 누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종혁 경희대 교수는 한국 기자들이 뉴스 가치 판단에 사용하는 56개 개념을 정리했다. ‘사회적 중요도’ ‘새로운 볼거리’ ‘수용자 관련성’ ‘인간적 흥미’ 등을 한국 기자들이 중시한다는 점을 밝혔다.(, 2013) 그 범주를 빌리자면, 은 ‘사회적 중요도 ’를 최고로 쳤다. 이에 걸맞은 뉴스를 발굴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족함을 절감한다. 이제 그 과정 전체를 근본부터 점검하고 성찰하며 혁신하려 한다.
남들은 추수하는 가을, 우리는 씨앗을 고른다. 9월과 10월, 은 콘텐츠 혁신토론을 벌인다. 독자 조사와 함께 다양한 의견도 모을 것이다. 어쩌면 가을이 끝나기 전, 늦어도 겨울이 다 가기 전 거듭 갱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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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생을 알리는 꽃처럼, 디지털팀이 새로 만들어졌다. 조만간 디지털팀장도 만리재에 둥지를 틀 것이다. 그래봐야 두세 명의 적은 인력이다. 두 달이면 해결되지 싶었던 일이 여섯 달 만에, 그것도 겨우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이지만,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전달하여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에 대한 고민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라 기대한다.
각자의 비애를 안고 실존을 살아내는 기자들이 때로 안쓰럽지만, 우리는 씨름하는 존재이지 슬픔에 젖는 존재가 아니다. 가을 내내 토론하고 탐사하면서 시대의 비애를 떨쳐낼 것이다. 가을이 고민으로 깊어가는 동안에도 굵직한 기사를 연이어 선보이겠다. 정기구독으로 성원해주시길 감히 부탁드린다. 구독 신청은 1566-9595.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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